강화 삼랑성 ( )

건축
유적
문화재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정족산에 있는 산성.
이칭
이칭
정족산성(鼎足山城)
유적
관련 국가
고려, 조선
관련 인물
양헌수
둘레
2.3km
면적
260,536㎡
소재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산41번지 일원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1964년 06월 10일 지정)
소재지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산41번지
내용 요약

강화 삼랑성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정족산에 있는 산성이다.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쌓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정족산성이라고도 한다. 산성이 언제 쌓아졌는지는 분명치 않은데 강화 천도기 성 안에 가궐(假闕)을 지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적어도 13세기에는 산성이 축조되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둘레 약 2.3km인 삼랑성은 조선 후기에 여러 차례 성벽과 문루를 고쳐 쌓았고, 성내에 실록을 보관하였던 사고(史庫)가 있다. 1866년 병인양요 당시 양헌수가 이끄는 조선군이 프랑스군과의 전투에서 승전을 거둔 역사적 현장이다.

정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정족산에 있는 산성.
건립 경위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쌓았다고 하여 삼랑성(三郎城)이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주11이라고도 하는데, 세 개의 봉우리가 세 발 달린 솥 모양을 이룬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삼랑성이 언제 처음 쌓아졌는지는 분명치 않다. 1259년(고종 46) 4월 삼랑성에 주12을 지었다는 『고려사』의 기사로 보아 13세기에는 이미 산성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전기에 산성으로서 기능을 잃었던 것을 1660년(현종 1)에 다시 쌓았다. 같은 해 성 안에 사고(史庫)를 지어 마니산에 있던 실록을 옮겨 왔고, 이때 왕실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 보각(璿源譜閣)도 세웠다. 1739년(영조 15)에 성을 중수하고 남문 주1를 세워 종해루(宗海樓)라고 하였다. 1783년(정조 7)에 중건이 이루어지는 등 여러 차례 성벽과 문루를 고쳤다. 1784년(정조 8)에는 성내에 주2인 정족창(鼎足倉)을 설치하였고, 이후 사고 수호를 목적으로 군사 주둔지인 정족산성진(鼎足山城鎭)을 두었다.

변천

1866년(고종 3) 9월 병인양요프랑스군이 강화부를 점령하자 10월 1일(음력) 순무천총(巡撫千摠) 양헌수(梁憲洙)포수와 군사 500여 명을 이끌고 김포의 덕포를 거쳐 강화 해협(염하)을 건너 정족산성에 진입한 뒤, 10월 3일 성에 접근한 150여 명의 프랑스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여 격퇴하였다. 전투에 패배한 프랑스군은 강화에서 철수하였다. 1873년(고종 10) 병인년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성내에 양헌수 승전비를 세웠다. 1908년 10월에는 해산된 강화 진위대 소속 군인과 주민들로 구성된 의병 부대가 성내에 있는 전등사에서 토벌에 나섰던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강화 삼랑성은 1964년 6월 10일에 사적 제130호로 지정되었다. 1976년 남문을 복원하고 문루인 종해루를 세웠으며 1998년 사고와 선원 보각을 복원하였다. 2011년에 삼랑성에서 강화 삼랑성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발굴 경위 및 결과

산성에 대한 발굴은 이루어지지 않아 성의 초축 시기와 구체적인 구조는 확인되지 않았다. 2008~2009년 정족산성지에 대한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곳은 강도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전하는 가궐터로 알려져 있었으나 조사 결과, 조선 후기 사고를 수호할 목적으로 설치한 정족산성진터로 밝혀졌다. 내사, 진사, 포량고 등 건물지와 담장지, 문지 등 11개소의 건물지가 확인되었으며 앞서 세워진 정족창과 관련한 주13도 조사되었다.

형태와 특징

삼랑성은 정족산(해발 231m) 동쪽에 자리한다. 둘레 약 2.3km이며 지형을 따라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은 형세를 이룬다. 성벽은 정족산 정상에서 북동쪽과 남동쪽으로 뻗어 내린 2개의 능선을 따라 이어지면서 능선 사이에 형성된 넓은 곡부를 감싸 안은 형태로 축조되었다. 산성 분류에 따르면 고로봉식 산성에 해당한다. 성벽은 구간마다 축조 형태의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자연 주3을 이용하여 주4와 수평 줄눈 쌓기로 축조하였다.

산성에는 동 · 서 · 남 · 북 4개의 문이 있다. 산성에서 가장 높이가 낮은 동남쪽 곡간부에 남문이 설치되었고 나머지 3개의 문은 능선 사이에 형성된 말 안장과 같이 낮아지는 구간에 축조되었다. 남문은 육축부와 문루가 복원되어 있다. 동문과 서문은 문 안팎이 성벽 위에 벽돌로 홍예를 이룬 형태이며 북문은 평거식의 주6이다. 성벽이 회절하는 곳에는 주9주10이 여러 개 설치되었다. 일부 구간에는 할석으로 쌓은 주7주8이 남아 있으며 남문 북쪽에 수구(水口)가 있다.

산성 내에는 전등사, 복원된 사고와 선원 보각, 정족산성진지가 있고 동문 안쪽에 양헌수 승전비가 위치한다.

의의 및 평가

강화 삼랑성은 고려~조선시대 국방 요충지 가운데 하나다. 3백여 년간 『조선왕조실록』을 수호하였고 19세기 말 병인양요 당시 서양 세력과의 전투에서 처음 승전을 거둔 역사적 현장이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강도지(江都志)』
『여지도서(輿地圖書)』
『강화부지(江華府志)』

단행본

『강화도의 국방유적』(육군박물관, 2000)
『강화의 문화유적』(대한불교조계종문화유산발굴조사단·강화군, 2000)
『정족산성진지』(한울문화재연구원, 2010)
『한국고고학전문사전- 성곽편』(국립문화재연구소, 2012)
『신편 강화사 증보』(강화군사편찬위원회, 2015)

인터넷 자료

국가문화유산포털(http://www.heritage.go.kr)
국립문화재연구원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 (https://portal.nrich.go.kr)
주석
주1

궁문, 성문 따위의 바깥문 위에 지은 다락집. 우리말샘

주2

군대의 창고. 우리말샘

주3

구조물의 기초에 쓰이는 깬돌. 1개의 중량이 10~100kg로 여러 종류가 있다. 우리말샘

주4

크기가 다른 돌을 줄눈을 맞추지 아니하고 불규칙하게 쌓는 일. 우리말샘

주5

궁문, 성문 따위의 바깥문 위에 지은 다락집. 우리말샘

주6

성벽에 누(樓) 없이 만들어 놓은 문. 적의 눈에 띄지 아니하는 곳에 만들어서 평소에는 돌로 막아 두었다가 필요할 때에 비상구로 사용하였다. 우리말샘

주7

성 위에 낮게 쌓은 담. 여기에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거나 공격하거나 한다. 우리말샘

주8

몸을 숨긴 채로 총을 쏘기 위하여 성벽, 보루(堡壘) 따위에 뚫어 놓은 구멍. 우리말샘

주9

성문을 밖으로 둘러 가려서 구부러지게 쌓은 성. 우리말샘

주10

성 위에 낮게 쌓은 담. 여기에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거나 공격하거나 한다. 우리말샘

주11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의 정족산(鼎足山)에 있는 고성(古城). 단군이 세 아들에게 명하여 쌓았다는 전설이 전한다. 성안에 전등사, 정족산 사고(史庫)의 유지(遺址), 양헌수 승전비 따위가 남아 있다. 정족산에 있어 붙인 이름이다. 사적 정식 명칭은 ‘강화 삼랑성’이다. 우리말샘

주12

임시로 지은 궁궐. 우리말샘

주13

옛날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자취. 우리말샘

집필자
이희인(인천시립박물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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