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취려(金就礪, 11721234)는 언양 출신으로 12161219년 두 차례에 걸친 거란의 침입을 격퇴하고 몽골과 형제의 맹약을 체결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공적을 인정받아 관직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천도와 함께 강화에 옮겨 살다가 1234년(고종 21) 5월, 63세의 나이에 사망하였다. 사후 위열(威烈)의 시호를 받았고, 고종(高宗)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김취려의 묘지명에는 1234년 7월 강화 진강현(鎭江縣) 대곡동(大谷洞) 서쪽 기슭에 장사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공의 묘지명은 일제강점기 강화 양도면 하일리에 있는 무덤에서 도굴되어 존재가 확인되었는데, 해당 무덤의 위치가 묘지명의 기록과 일치한다. 울산 언양의 위열공 묘소는 조성 경위나 시기에 대해 알려져 있지 않은데, 현재 언양김씨 종중에서 언양과 강화 묘소를 모두 김취려묘로 인정하고 있다.
김취려묘는 울산 언양읍 화장산(271m)의 동북쪽 계곡 사이에 북서-남동 방향으로 뻗어 내린 구릉에 자리한다. 봉분은 평면 원형이며 앞쪽에 상석과 제단이 있고 좌우에 묘비가 세워져 있다. 봉분 정면 왼쪽 묘비는 일부만 남은 것을 신재(新材)와 결합하여 세웠다. 남은 비문으로 보아 16세기 말 건립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오른쪽 묘비는 1717년(숙종 43) 후손인 당시 경주부윤 김치룡(金致龍)이 1670년(현종 11)에 외손 민시중 등이 세운 것을 고쳐 세운 것이다.
묘역 양쪽에 고려시대 양식의 석인상이 2기씩 배치되어 있다. 직사각 기둥으로 된 몸체에 큰 두상이 연결된 장승형으로 정면에 홀(笏)을 들고 있다. 이 중 2기는 목이 부러져 있다. 2018년 묘역 정비 보수가 이루어졌으며, 근래에 조성하였던 봉분 병풍석과 문인석, 무인석을 제거하여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묘역 아래에는 1989년에 건립된 재실 송릉재(松陵齋)와 1867년(철종 8)에 세운 김취려장군태지유허비(金就礪將軍胎地遺墟碑)가 있다.
김취려묘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송대리 산15번지에 있다. 묘의 조성 시기와 경위는 알려져 있지 않다. 묘비의 내용으로 보아 조선 후기 후손들이 여러 차례 묘역을 보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80년대에 묘역 정비가 이루어졌고, 2018년 보수 정비를 거쳐 현재의 모습에 이르렀다.
1987년 5월 19일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행정구역 변경으로 1997년 10월 9일 울산광역시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강화의 김취려묘는 언양김씨 종친회에서 새롭게 정비하였고, 2010년 12월 6일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울산과 강화 묘소 모두 언양김씨 종친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김취려묘는 조성 경위와 시기를 알 수 없으나, 거란 침입을 격퇴한 주역으로 고려시대 영토를 수호하였던 김취려의 업적을 살펴볼 수 있는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