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숭겸장군유적은 대구광역시 동구에 있는 고려 전기 무신 신숭겸을 기리는 유적이다. 공산전투에서 태조를 대신해 전사한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을 기리기 위해 왕건이 공이 숨진 자리에 지묘사와 순절단을 세워 명복을 빌었다. 조선 후기 때 후손들이 신숭겸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옛 절터에 표충사를 세우고 단을 중건하여 오늘날의 모습에 이르렀다.
고려 전기 무신 신숭겸(申崇謙, ?927)은 후백제와의 공산전투(公山戰鬪)에서 포위된 태조(太祖, 877?)를 대신해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태조는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장절(壯絶)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전사한 자리에 지묘사(智妙寺)와 순절단(殉節壇)을 세워 명복을 빌었다.
시신은 광해주(光海州, 현재 춘천)에 안장되었다. 순절단은 신숭겸이 태조의 옷을 바꾸어 입고 피신시킨 후 싸우다가 전사한 자리로, 그곳에서 피 묻은 흙과 옷을 수습하여 묻고 쌓았다고 전해진다. 순절단을 수호하였던 지묘사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데 고려 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2004년 유적지 경내에서 지묘사의 흔적으로 추정되는 유구와 유물이 확인되었다.
1607년(선조 40)에 신숭겸의 외손인 경상도 관찰사 유영순(柳永詢)이 옛 절터에 사당과 충렬비(忠烈碑)를 건립하고 표충단(表忠壇)을 쌓아 장군의 충절을 추모하였다. 1672년(현종 13) 사당은 표충사(表忠祠)라 사액(祠額)을 받았다.
1819년(순조 19)에 후손 신의직(申義直)이 단을 중수하고 옆에 ‘고려장절신공순절지지비(高麗壯絶申公殉節地之碑)’를 세웠다. 1871년(고종 8) 서원 철폐령으로 표충사가 헐렸지만, 이후 후손들이 중건하였다.
신숭겸장군유적(申崇謙將軍遺蹟)은 대구광역시 왕산(王山)의 남쪽과 동화천 사이의 편평한 대지에 자리한다. 경내의 동남쪽에 표충단과 순절비가 있고 북쪽에 표충사가 있다.
표충단은 평면 방형으로 네 면을 석축으로 쌓고 위로 흙을 돋은 뒤 사각형 기단석을 두른 둔덕을 두어 이중 봉분의 형태를 이룬다. 표충사의 건물 배치는 외삼문 안쪽에 표충재(表忠齋)와 동재 · 서재가 있고, 내삼문 너머에 제향 공간이 자리한 형태이다.
표충사 서측 경역에는 후대에 건립된 강당 상절당(尙節堂)이 있다. 표충재 동쪽에는 1607년 건립된 ‘고려태사장절신공충렬지비(高麗太師壯節申公忠烈之碑)’가 세워져 있다. 충렬비의 비문은 신흠(申欽)이 짓고 김현성(金玄成)이 글을 쓰고, 김상용(金尙容)이 전서(篆書)를 썼다.
신숭겸장군유적은 대구광역시 동구 신숭겸길 17(지묘동, 신숭겸장군유적지)에 자리한다. 1982년 3월 4일 대구시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1980~1990년대 표충사 건물이 복원되어 지금의 모습을 이루었다.
유적 지정 면적은 45,180㎡이며, 평산 신씨 표충재종중에서 관리를 하고 있다. 유적지 주변에는 공산전투와 관련된 유적과 지명이 남아 있다. 신숭겸장군유적은 고려와 후백제의 공산전투가 벌어졌던 역사적 현장이며, 태조를 대신해 전사한 신숭겸의 충성과 절의를 살펴볼 수 있는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