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건적은 중국 원나라 말기에 허베이성 일대에서 일어난 한족 반란군이다. 머리에 붉은 두건을 둘렀다고 해서 붙은 이름으로 홍두적(紅頭賊)·홍적(紅賊)이라고도 한다. 홍건적의 일부가 요동을 점령했다가 원의 반격에 쫒겨 고려를 침범하였다. 1359년 4만 명이 쳐들어와 의주·정주·인주가 함락되었고, 철주와 서경까지 함락되었다. 이듬해 서경을 탈환하고 홍건적을 압록강 이북으로 몰아냈다. 그런데 1361년에 10만 명이 다시 침범하여 개경이 함락되었다. 홍건적의 압박을 완화하고자 원과의 제휴를 모색하게 되면서 반원정책이 퇴색하였고, 무장들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머리에 붉은 두건(頭巾)을 둘렀다고 해서 홍건적이란 이름이 붙었으며, 홍두적(紅頭賊) · 홍적(紅賊)이라고도 한다.
1355년(공민왕 4) 국호를 송(宋)이라 정하고 허난성(河南省) · 산시성(山西省) · 산시성(陜西省) 등지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 일부가 만주(滿洲) 지역으로 북진해 요동(遼東)을 점령했다가 원의 반격에 쫓기게 되자 고려를 침범하였다. 고려에서는 이미 1354년에 원의 요청에 따라 군사 2,000명을 원에 파견한 적이 있다. 1357년에는 김득배(金得培)를 서북면홍두군왜적방어도지휘사(西北面紅頭軍倭賊防禦都指揮使)로 삼아 홍건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하지만 1359년 12월 모거경(毛居敬)이 4만 명의 무리를 이끌고 쳐들어와 의주(義州) · 정주(靜州) · 인주(麟州)가 함락되었다. 또한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이암(李嵒)을 서북면도원수로, 경천흥(慶千興)을 부원수로, 김득배를 도지휘사로 삼아 침입을 막으려 했으나 철주(鐵州)와 서경(西京)이 계속해서 함락되었다. 이에 이암 대신 이승경(李承慶)을 도원수로 삼고, 다음 해 1월에 2만 명의 군사를 보내 서경을 탈환하였다. 또 2월에는 정주 · 함종(咸從) · 안주(安州) · 철주 등지에서 이들을 섬멸해 압록강 이북으로 몰아내었다.
이 후 홍건적은 해로를 이용해 풍주(豊州) · 봉주(鳳州) · 안악(安岳) · 황주(黃州) · 안주 등 해안 지방에서 노략질을 일삼았다. 그러다가 1361년 10월 반성(潘誠) · 사유(沙劉) · 관선생(關先生) · 주원수(朱元帥) 등이 10만의 무리를 이끌고 다시 고려를 침범하였다. 삭주(朔州) · 이성(泥城) · 무주(撫州) · 안주가 함락되고, 흥의역(興義驛 : 牛峰)에 이르러 개경(開京)을 위협하였다. 이에 공민왕은 광주(廣州)를 거쳐 복주(福州 :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로 파천(播遷)하고 개경은 함락되었다.
그 해 12월에 고려는 복주에서 군사를 정비해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정세운(鄭世雲)을 총병관(摠兵官)으로 삼아 적을 막게 하였다. 또한 각 도에서 20만 명의 군사를 소집하고 참지정사(參知政事) 안우(安祐)를 상원수로, 정당문학(政堂文學) 김득배를 도병마사로,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정휘(鄭暉)를 동북면도지휘사로 삼아 개경을 탈환하도록 하였다. 다음 해 1월에 고려군은 개경에 진격해 적을 대파하고 관선생 · 사유 등을 잡아죽였다. 이에 적은 압록강을 건너 모두 퇴각하였다. 이 후에도 좌정승(左政丞) 유탁(柳濯)을 서북면홍적방어제군도통사(西北面紅賊防禦諸軍都統使)로, 밀직사 이순(李珣)을 도병마사로, 김한귀(金漢貴) 등 12명을 제도병마사로 삼아 재침에 대비했으나, 대대적인 침범은 없었다.
이 전란을 계기로 고려에서는 홍건적의 압박을 완화하고자 원과의 제휴를 적극적으로 모색하게 되었다. 이에 1356년 이후 계속되어온 반원정책이 퇴색하고, 1361년에는 정동행성(征東行省)이 다시 설치되었다. 또 다음 해에는 관제가 개혁되어 1356년 이전의 모습으로 환원되었다. 전공을 세운 무장들의 지위도 뚜렷하게 향상되었다. 비록 정세운 · 안우 · 이방실(李芳實) · 김득배 등은 김용(金鏞)의 책략으로 일어난 삼원수 살해사건(三元帥殺害事件)으로 모두 죽임을 당하지만, 최영(崔瑩) · 오인택(吳仁澤) 등은 1363년 흥왕사(興王寺)의 난을 진압하면서 김용을 제거하고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또한 전란 중 개경을 수복할 때 참가한 이성계(李成桂)의 존재가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전란을 겪으면서 사회적 혼란과 변화도 매우 컸다. 경기지방의 호적(戶籍)이 없어지는 등 국가의 지배력이 약화되고, 권세가들에 의한 토지와 인구의 탈점이 널리 행해졌다. 그 결과 신분제도의 혼란과 농장의 발달 등이 더욱 촉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