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진지왕릉 ( )

경주 진지왕릉 정측면
경주 진지왕릉 정측면
고대사
유적
국가유산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제25대 진지왕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능.
국가문화유산
지정 명칭
경주 진지왕릉(慶州 眞智王陵)
분류
유적건조물/무덤/왕실무덤/고대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사적(2011년 07월 28일 지정)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4길 80-100 (서악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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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제25대 진지왕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능.
개설

2011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2011년 지정된 진지왕릉으로 전하는 무덤이다. 아래쪽에 있는 전 문성왕릉과 마찬가지로 산사면의 일부를 깎아 평탄하게 한 후에 지름 20.6m, 높이 5.5m의 크기를 가진 원형봉토분이다. 봉토의 밑둘레에 자연석 일부가 노출되어 있는데 호석으로 추정된다. 이외에 봉분 주변에 석물이나 장식은 하나도 없다. 매장주체부는 고분의 입지와 인근의 서악동고분을 보면 횡혈식석실묘로 추정된다. 현재 이 고분 앞에는 신라진지왕릉이라는 능표석이 있다.

역사적 변천

2011년 사적으로 지정된 경주 진지왕릉은 1730년(영조6년)에 이르러 경주김씨 일족에 의하여 진지왕릉으로 비정되어 1969년 8월 27일 사적 신라진지문성왕릉으로 지정되었다. 진지왕릉으로 지정한 원인은 『삼국사기(三國史記)』신라본기에 진지왕의 장지를 진흥왕릉과 함께 영경사 북봉(永敬寺 北峰)의 영경사를 서악동 삼층석탑이 있는 곳에 비정하였는 데에 기인한다. 서악동3층석탑은 형식상 9세기후반에 편년되어서 6세기후반의 진지왕릉과 맞지 않는다. 1817년경주를 방문한 김정희는 무열왕릉 뒷편의 서악동고분군에 주목하면서 2호분을 진지왕릉으로 비정하였고, 강인구는 3호분을 진지왕릉에, 이근직은 무덤의 특징과 묘제, 조영순서 등을 고려하여 서악동1호분에 비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11년 고분군의 역사성과 특성을 고려하여 고분군을 분리하여 재지정하면서 사적 경주 진지왕릉으로 명명하였다.

의의와 평가

사적 신라 진지왕릉은 선도산의 남쪽 구릉을 따라 형성된 서악동고분군3의 아래쪽에 만들어진 5기의 고분 가운데 하나이다. 5기의 고분은 2기는 앞의 고분군이 형성된 능선을 따라 나란히 배치되었고, 그 아래에 3기는 옆으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진지왕릉은 능선을 따라 배치된 2번째 고분이다. 진지왕의 무덤을 『삼국사기(三國史記)』는 ‘葬于永敬寺北(장우영경사북)’으로 『삼국유사(三國遺事)』는 ‘墓在哀公寺北(묘재애공사북)’으로 기록하고 있어서 후세에 많은 혼돈을 초래하게 되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무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추정에 그치고 있는 단계이다.

참고문헌

『신라왕릉연구』(이근직, 학연문화사, 2012)
『경주서악지역지표조사보고서』(경주문화재연구소, 1994)
「신라왕릉의 재검토(1) 유화계의 나릉진안설」(강인구,『동방학지』제41집, 1984)
「전 진지왕릉 경주 전 진지왕릉」(이근직,『한국고고학사전 고분편』, 2009)
관련 미디어 (2)
집필자
박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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