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문성왕릉 ( )

경주 신라 문성왕릉 정측면
경주 신라 문성왕릉 정측면
고대사
유적
국가유산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제46대 문성왕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능.
국가문화유산
지정 명칭
경주 문성왕릉(慶州 文聖王陵)
분류
유적건조물/무덤/왕실무덤/고대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사적(2011년 07월 28일 지정)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4길 80-100 (서악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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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제46대 문성왕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능.
개설

2011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경주 문성왕릉으로 재지정된 이 고분은 선도산의 남쪽 구릉 말단부에 전 헌안왕릉과 함께 있다. 구릉 말단부의 사면을 깎아 대지를 만들고 지름 18.9m, 높이 4.5m의 원형 봉토분을 이루고 있다. 매장 주체부는 경주 지역에서 확인되는 다른 고분의 입지로 볼 때 횡혈식 석실로 추정된다. 봉토의 주위에서 석물이나 호석은 확인되지 않았다. 묘 앞에는 신라문성왕릉(新羅文聖王陵)이라고 새긴 능표석만 서 있다.

역사적 변천

경주 문성왕릉은 1730년(영조 6)에 이르러 경주김씨 일족에 의하여 지정되었다. 그 원인은 경주 사람들이 선도산 일원을 산작지(山雀址)로 불렀는데 『삼국사기(三國史記)』신라본기에 문성왕의 장지로 기록한 공작지(孔雀址)와 동일한 곳으로 여긴 데에서 비롯된다. 진흥왕순수비를 발견한 추사 김정희는 1817년 경주의 진흥왕릉과 진지왕릉을 방문하면서 『삼국사기(三國史記)』 ‘葬于孔雀址(장우공작지)’에 주목하여 무열왕릉 서쪽에 입지해 있는 서악동 고분군 가운데 제3호분을 문성왕릉으로 비정하였다. 1969년 8월 27일 사적 지정 때 진지왕릉과 문성왕릉이 같은 지번에 있어서 사적 신라진지․문성왕릉으로 지정하였다가 2011년 7월 28일 고분군의 역사성과 특성을 고려하여 분리하고 사적 ‘경주 문성왕릉’으로 재지정하였다.

의의와 평가

경주 문성왕릉은 선도산의 남쪽 구릉을 따라 형성된 서악동 고분군의 아래쪽에 만들어진 5기의 고분 가운데 하나이다. 5기의 고분 중 2기는 앞의 고분군이 형성된 능선을 따라 나란히 배치되었고, 그 아래에 3기는 옆으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문성왕릉은 옆으로 나란히 배친된 고분 3기 중 가장 동쪽에 입지한 무덤이다. 이 문성왕의 무덤에 대해서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고 다만 『삼국사기』에 기록된 ‘공작지’에 근거하여 조선 후기의 김씨일족이 문성왕의 무덤으로 비정한 것이 오늘날까지 이른 상황이다. 제23대 법흥왕부터 제29대 무열왕으로 이어지는 신라 중고기의 혈통에서 한참 늦은 시기인 제46대 문성왕이 같은 묘역에 묻히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따라서 고분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추정에 그치고 있는 단계이다.

참고문헌

『신라왕릉연구』(이근직, 학연문화사, 2012)
『한국고고학전문사전』고분편(국립문화재연구소, 2009)
『경주서악지역지표조사보고서』(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1994)
관련 미디어 (2)
집필자
박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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