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보 선생 묘 ( )

고려시대사
유적
문화재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에 있는 고려 후기 문신이자 문장가인 이규보의 무덤.
이칭
약칭
이규보 묘
유적/고인돌·고분·능묘
양식
무덤
건립 시기
고려 후기
관련 국가
고려
관련 인물
이규보
소재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시도지정문화재
지정기관
인천광역시
종목
인천광역시 시도기념물(1995년 03월 02일 지정)
소재지
인천 강화군 길상면 까치골길 72-17 (길직리)
내용 요약

이규보선생묘(李奎報先生墓)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에 있는 고려 후기 문신이자 문장가인 이규보의 무덤이다. 이규보는 천도와 함께 강화에 옮겨 와 살다가 1241년(고종 28) 9월 74세로 사망한 뒤 진강산 동쪽 기슭에 묻혔다. 봉분과 석물, 묘역의 형태는 후대에 정비되어 본래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으나, 이규보의 생애와 강도 시기 강화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유적이다.

정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에 있는 고려 후기 문신이자 문장가인 이규보의 무덤.
연원/역사적 관련 사항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고려 후기 문신이자 문인이다. 1189년(명종 19) 주1 급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감수국사(監修國史)에 이르렀다. 시문에 능한 명문장가로 『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과 「 동명왕편(東明王篇)」, 「대장경각판군신기고문(大藏經刻板君臣祈告文)」 등 다수의 문집과 글을 남겼다.

천도 당시 강화로 옮겨 와 살다가 1241년(고종 28) 9월 74세로 사망한 뒤 진강산 동쪽 기슭에 묻혔다. 묘지명에 “명산 옆에 들이 널리 널리 펼쳐져 있고 봉우리가 우뚝 우뚝 솟아 있다.”라고 공의 장지(葬地)를 묘사하였다. 조선시대 지지(地誌)에는 진강산 동쪽 기슭, 백운동(白雲洞)에 묘소가 있다고 전한다.

형태와 특징

이규보선생묘는 강화 진강산 동쪽에 연접한 덕정산의 남동쪽 지맥에서 뻗어내린 낮고 편평한 구릉에 자리한다. 봉분은 지름 3.8m의 원형이며 뒤편에 꼬리[용미(龍尾)]가 이어져 2단으로 조성된 주2과 연결된 모습이다. 봉분 하단에는 현대에 설치된 주3이 조성되어 있다.

봉분 전면에는 2단의 주4이 설치되어 있다. 1단 계체석 아래로 주5주6, 4각 장명등이 세워져 있고, 좌우에 주7주8, 주9이 한 쌍씩 배치되었다. 봉분 전면 우측에는 ‘고려이상국문순공하음백규보지묘(高麗李相國文順公河陰伯奎報之墓)’라 새겨진 묘비(1919년 건립)가 세워져 있으며 진양진씨(晉陽晉氏)와 합장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묘역 내 주10 가운데 사각기둥형 몸체에 큰 머리를 얹은 장승 형태의 고려시대 양식 석인상 2기를 제외하고, 대부분 후대에 제작된 것이다. 봉분과 사성 등의 구조도 후대에 변형되어 매장 당시 묘제의 모습은 남아 있지 않다. 묘역 좌측 아래에는 영정을 모신 유영각(遺影閣)과 묘역정비기념비(1991년 건립), 이규보선생문학비(1983년 건립)가 있다. 우측에는 신도비와 재실인 사가재(四可齋)가 건립되어 있다.

현황

이규보선생묘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까치골길 72-17(길직리 산115)에 있다. 1960년대 후손들이 묘역을 정화한 데 이어 1980년대 유영각과 사가재, 문학비 등을 건립하는 등 대대적인 정비 사업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1972년 5월 4일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고,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1995년 3월 2일 인천광역시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묘역의 면적은 668.9㎡이며 여주이씨 문순공파 대종회에서 관리를 하고 있다.

의의 및 평가

묘역의 구조와 석물은 후대에 정비되어 본래의 모습은 남아 있지 않으나, 고려시대 대표적 문신이자 문장가인 이규보의 생애와 주11 시기 강화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유적이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여지도서(輿地圖書)』

단행본

『신편 강화사 증보』(강화군 군사편찬위원회, 2015)
『강화의 문화유적』(강화군 · 조계종문화유산발굴조사단, 2002)
김용선, 『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한림대학교출판부, 2001)

인터넷 자료

국가문화유산포털(https://www.heritage.go.kr/)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https://portal.nrich.go.kr/)
주석
주1

생원과 진사를 뽑던 과거. 초시와 복시가 있었다.    우리말샘

주2

풍수지리에서, 묏자리의 뒤에 작은 맥이 혈의 가를 에워싼 두둑.    우리말샘

주3

능(陵)을 보호하기 위하여 능의 위쪽 둘레에 병풍처럼 둘러 세운 긴 네모꼴의 넓적한 돌. 겉에 12신(神)이나 꽃무늬 따위를 새긴다.    우리말샘

주4

무덤 앞에 편평하게 만들어 놓은 장대석.    우리말샘

주5

무덤 앞에 제물을 차려 놓기 위하여 넓적한 돌로 만들어 놓은 상.    우리말샘

주6

무덤 앞에 향로를 올려놓는 네모반듯한 돌. 탁상 모양을 새긴다.    우리말샘

주7

돌로 사람의 형상을 만든 조형물.    우리말샘

주8

왕릉이나 무덤 앞에 세워 놓은, 돌로 만든 양 모양의 조각물.    우리말샘

주9

무덤 앞의 양쪽에 세우는 한 쌍의 돌기둥. 돌 받침 위에 여덟모 진 기둥을 세우고 맨 꼭대기에 둥근 대가리를 얹는다.    우리말샘

주10

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들어 놓은 여러 가지 물건. 석인(石人), 석수(石獸), 석주, 석등, 상석 따위가 있다.    우리말샘

주11

‘강화’의 다른 이름. 고려 고종 19년(1232)에 몽고의 침입으로 도읍을 이곳으로 옮긴 후, 원종 11년(1270)에 환도(還都)할 때까지 39년 동안 임시 수도로 삼았다 하여 생긴 이름이다.    우리말샘

관련 미디어 (3)
집필자
이희인(인천시립박물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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