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는 특정 지역의의 인문지리적 현상을 분류·연구 기록한 서적이다. 지리지라고도 한다. 일정한 항목과 규칙에 따라 체계적으로 서술하여 정해진 지역을 이해할 수 있게 한 책이다. 우리나라의 지지는 『삼국사기』·『삼국유사』의 백제지리지, 신라지 등에서 시작된다. 이어 『고려사』의 지리,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등이 편찬되었다. 1500년대 후반부터는 고을 읍지가, 1700년대 이후에는 전국지지 편찬이 이어졌다. 조선 후기 김정호의 개인적 전국지지 편찬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광복 이후 현재까지 수많은 지지가 편찬·간행되었다.
지지(地誌)는 특정한 기준에 따라 정해진 범위의 지역에 대해 일정한 항목과 규칙에 따라 체계적으로 서술하여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든 책이다. 지리지 또는 지리서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의 지지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백제지리지, 신라지 등을 비롯하여 『고려사』의 지리(56~58권),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동국문헌비고』, 『증보동국문헌비고』, 『증보문헌비고』, 『동여편고』, 『동여도지』, 『여도비지』, 『대동지지』, 『여재촬요』, 『대한지지』, 『초등대한지지』, 『조선환여승람』, 『한국지지』 등이 편찬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다.
지역의 범위를 정하는 기준은 다양할 수 있지만 정치 · 행정의 경계가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우리나라에서 사용되는 지지 서술의 지역 단위는 대륙, 국가, 도, 시 · 군 등이 보편적이며, 면이나 동인 경우도 있다. 조선시대의 경우 대륙이나 국가 등 외국을 대상으로 한 지지가 일부 있지만 대부분 국내를 대상으로 한 지지였다.
전통시대 국가의 최고 통치자가 돌아다니지 않고 넓은 영토의 구석구석을 체계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으로 첫 번째가 지지이고 두 번째가 지도이다. 지지는 서술하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정보를 체계적으로 담아 이용할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지만 한눈에 이미지로 볼 수 없는 단점이 있다.
반면에 지도는 한눈에 이미지로 볼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지만 지면의 한계 상 많은 정보를 수록할 수 없는 단점이 있다. 따라서 중앙에서 전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는 ‘한 손에는 지도를, 한 손에는 지리지를’이라는 문구가 상징하고 있듯이 지도와 지지를 상호 보완적으로 편찬하여 이용해야 한다.
인류의 역사에서 지지와 지도의 발생은 문명과 국가가 탄생하는 그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어떤 국가도 넓은 영토에 대한 정보를 체계화시키지 않고는 전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세월의 무게나 전쟁 등의 요인 때문에 훼손되어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현재까지 전해지는 지지와 지도의 양이 현저하게 적어진다.
따라서 대부분의 연구는 자료가 많이 남아 있는 시기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한계가 있음을 고려하면서 변천사를 이해해야 한다. 또한 지지와 지도에 대한 필요성의 수준과 종류는 영토의 규모, 통치 체계의 성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대륙이나 국가를 대상으로 한 외국 지지의 경우도 외국과의 인적 · 물적 · 지적 교류의 정도에 따라 발달 수준이나 종류가 달라진다.
국가의 지방행정단위별로 편찬된 전국지지가 가장 번성할 수 있는 체제는 중앙에서 지방관을 파견하여 전국의 모든 지역을 직접 통치하는 중앙집권체제이다. 각 행정단위에 부과해야 할 조세 · 군역 · 공물 등을 중앙에서 일일이 검토하며 확인해야 하기 때문에 전국 모든 지역의 상황에 대한 중요 정보를 중앙에서 직접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
반면에 각 지역의 통치는 해당 지배층에게 맡기고 중앙에서는 국가의 핵심 기능만 통제하는 지방분권체제에서는 중앙에서 갖추고 있어야만 할 정보량이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일정한 항목과 규칙에 따라 지방행정단위별로 편제된 전국지지의 발달 가능성은 중앙집권체제의 국가가 지방분권체제의 국가보다 더 높다.
지방행정단위별로 편찬된 전국지지의 발달에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요소는 국가의 규모이다. 도시국가처럼 영토가 작아 지방행정단위로 나누어지기 어려울 경우 전국지지가 발달하기 어려운 것은 당연한 것이다. 따라서 유럽의 고대 그리스나 중세 유럽처럼 독립적인 작은 영역의 도시국가나 영주국가가 분립해 있는 경우 전국지지는 발달하기 어렵다.
반면에 수많은 지방행정단위로 나누어 다스려야 할 정도로 영토가 넓은 경우 각 지역의 정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지 않으면 통치가 어렵기 때문에 전국지지의 발달 가능성이 높아진다. 유럽의 경우 고대 그리스 시대보다 로마제국에서 전국지지가 발달하였으며, 거대한 통일국가를 지속적으로 이룬 중국 대륙의 경우 전국지지가 가장 발달한 지역 중의 하나였다. 전국을 약 330개의 고을로 나누어 직접 다스렸던 조선의 경우도 전국지지의 편찬 없이 효율적인 통치를 이룰 수는 없었다.
외국을 대상으로 한 지지가 발달하기 위해서는 인적 · 물적 · 지적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져 다른 지역 정보의 확보 필요성이 높아져야 한다. 그리고 인적 · 물적 교류가 활발해지기 위해서는 국제무역이 성행하든지, 아니면 사신의 교환이나 기타 다른 형태의 교류를 위한 정치적 관계를 밀접하게 맺고 있어야 한다. 조선의 경우 인적 · 물적 교류는 적었지만 성리학으로 대표되는 유교를 통치 및 사회 운영의 기초로 삼았기 때문에 유교가 발생한 지역의 역사 정보에 대한 지적 호기심이 높았고, 그에 적합한 지지가 발달했다.
근대 이전의 전통시대에는 국가의 체제와 규모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일정한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보기 어렵다. 또한 동일 시대라고 하더라도 지역에 따라 국가의 체제와 규모가 서로 달랐다. 하지만 산업혁명과 근대국가의 성립은 세계적으로 중앙집권체제를 기초로 한 통일국가를 지향하는 흐름을 만들어냈다. 그 결과 일정한 항목과 규칙에 따라 전국의 지역행정단위별로 정보를 편제한 전국지지가 발달하게 되었다.
또한 세계 여러 지역과의 인적 · 물적 · 지적 교류 역시 일상화되면서 대륙별 · 국가별 단위로 정보를 편제한 세계지지 역시 발달하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정보화시대에 접어든 현대에도 계속 지속되고 있다. 세계 모든 지역의 지지 편찬 경향을 설명하는 것은 너무 광대한 작업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지지 편찬의 역사,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에 대해서만 서술하기로 한다.
고구려 · 백제 · 신라가 각축전을 벌이던 삼국시대의 지지로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없다. 다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백제지리지(百濟地理誌), 신라지(新羅誌) 등 지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일부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하여 삼국시대에 지지의 발달이 없었다고 단정 짓기 어렵다. 세 나라 모두 작은 소국에서 시작하여 넓은 영토를 정복한 국가였기 때문에 직접 통치를 한 흔적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현재로서는 어느 수준인지 알 수는 없지만 각 고을을 일정한 항목과 규칙에 따라 정리한 전국지지가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통일신라도 모든 고을에 지방관을 파견하여 직접 다스리는 중앙집권체제를 이루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지방 출신자를 철저히 차별하는 시스템을 운영하였기 때문에 고을 단위의 전국지지가 만들어졌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우리나라에서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전국지지는 1145년(인종 23)에 김부식(金富軾) 등이 왕의 명령을 받아 편찬한 총 50권의 『삼국사기』중 지(志) 9권의 3권부터 6권까지 수록된 지리 4권이다. 3권에서 5권까지는 신라로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통일신라의 행정단위를 기준으로 그 이전의 고을 연혁을 간략하게 정리한 것이다. 6권에는 고구려와 백제를 정리한 것으로, 주로 옛 이름만이 나열되어 있다.
고을의 정보 이외에도 신라 · 고구려 · 백제의 수도에 대한 정보가 가장 자세하게 수록되어 있고, 신라 부분의 경우 9주가 설치되어 변화된 연혁도 있다. 『삼국사기』에 수록된 지지의 내용만으로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지지 수준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 『삼국사기』는 순수한 전국지지가 아니라 삼국에서 통일신라까지의 역사 전체를 기록한 역사서이며, 그 안에 지지가 들어가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 편찬된 지지로서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은 『삼국사기』의 지리가 유일하며, 고려에 대해 편찬한 지지의 원본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세종의 명을 받은 김종서(金宗瑞) · 정인지(鄭麟趾) 등이 1451년(문종 1)에 완성하고 1452년(문종 2)에 인쇄한 『고려사(高麗史)』의 지리는 고려시대의 행정구역에 입각하여 서술되어 있다.
총 139권으로 이루어진 『고려사』에서 지리는 56권에서 58권까지 3권에 걸쳐 수록되어 있다. 56권에는 태조 왕건에서 성종을 거쳐 고려의 지방행정제도가 완성되는 현종까지 오도양계(五道兩界)의 광역행정단위와 경 · 목 · 부 · 군 · 현 · 진의 정비 과정 및 숫자가 기록되어 있다.
그 다음으로 수도였던 왕경 개성부의 자세한 연혁과 그에 속했던 적현(赤縣) 6개와 기현(畿縣) 7개의 연혁, 양광도의 주현과 속현의 연혁이 수록되어 있다. 57권에는 전라도와 경상도, 58권에는 교주도 · 서해도 · 북계 · 동계의 주현과 속현의 연혁이 수록되어 있다.
고려의 태조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한 후에도 지방관을 한 곳에도 파견하지 않고 각 고을의 통치는 해당 고을의 지배층인 호족에게 맡기는 간접 통치를 실행하였다. 대신 사심관 제도(事審官制度)와 같은 감시제도, 기인제(其人制)와 같은 인질제도를 통해 지방의 호족 세력들을 통제해 나갔다.
983년(성종 2)에 들어서야 처음으로 12목에 지방관을 파견하였으며, 1018년(현종 9)에 이르러 오도양계의 광역행정단위를 설정한다. 그리고 총 504개의 고을 중 25.8%에 불과한 130개의 주현에 지방관을 파견하여 74.2%의 속현까지 책임지는 정책을 취한다. 하지만 광역행정단위에 상주하는 지방관을 파견한 것은 아니며, 주현에 파견된 지방관도 직접 통치보다는 호족의 통치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역할에 머물렀다.
이후 1106년(예종 1)에 27개의 속현에 감무라는 지방관을 파견하여 주현으로 만든 것을 시작으로 고려 말에는 주현이 약 304개로 늘고, 속현이 160개로 줄어든다. 이렇듯 고려 말로 갈수록 지방관이 파견되는 주현이 늘어갔지만 파견된 지방관인 감무는 종6품의 현감보다도 지위가 낮아 고을의 행정을 직접 통제하는 역할은 약했다. 따라서 조선에 비해 고려는 지방 호족 세력들의 통치를 중앙에서 감시하고 통제하는 지방분권적인 성격이 상대적으로 강했다.
조선의 건국 후 3대 왕인 태종은 중앙집권화 정책을 강하게 추진한다. 첫째, 팔도체제를 확립하고 둘째, 속현을 혁파하여 주현의 땅으로 완전히 편입시키는 정책을 취했으며 셋째, 지방관 중 가장 낮은 7품 이하의 감무를 종6품의 현감으로 높이는 등 직접 통치를 강화시켰고 넷째, 끝에 주가 들어가는 군현의 이름을 산이나 천(川 ) 등으로 바꾸어 고을의 등급을 체계화시켰으며 다섯째, 작은 고을을 병합하여 통치의 효율성을 높이고자 하였다.
비록 이러한 모든 중앙집권화 정책이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태종 이후 조선은 지방관을 파견하여 고을을 직접 다스리는 확실한 중앙집권국가가 되었다. 이에 따라 중앙에서 각 고을의 정보를 체계적으로 갖추어 통치해야할 전국지지의 편찬 필요성이 높아졌고, 그 첫 번째 결실이 1424년(세종 6) 전국지지 편찬에 대한 세종의 명령으로 나타난다.
예조에서 각 고을의 지지 편찬 규칙을 만들어 각 도에 내려 보냈는데, 이 때 편찬된 도별지지 중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은 1425년(세종 7) 경상도 감영에서 편찬한 『경상도지리지』뿐이다. 한 부를 춘추관으로 보내고 또 한 부를 경상도 감영에 보관했는데, 이 중 후자의 것이 현재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경상도지리지』의 서문에는 모든 도와 고을에서 지켜야 할 11개의 조사 규칙이, 총론에는 도에서 지켜야할 14개의 규칙이, 경주부 부분에는 각 고을에서 지켜야 할 12개의 규칙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중 각 고을 부분에는 항목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연혁-역(驛)-대천(大川)-사방경계까지의 거리-진산-호구수-고적-토성(土姓)-공부(貢賦)-토산-토의(土宜)-염분(塩盆) · 제언-봉화-제사처의 순서로 되어 있고, 임내로 기록된 속현의 경우도 비슷한 내용으로 서술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경상도지리지』를 비롯한 8도의 지지를 바탕으로 1432년(세종 14)에 맹사성(孟思誠) 등이 재편집한 『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가 완성되는데, 전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것을 모본으로 하면서 거기에 빠져 있던 일부의 사실을 첨가하여 편집한 『세종실록지리지』가 전해지고 있다.
항목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중앙에서 파견된 관원의 등급과 숫자로부터 시작되어 연혁-별호-속현-산천-사방경계와 거리-호구수-군정-토성-내성(來姓)-속성(續姓)-인물-토질-기후-풍속-간전(墾田)-토의-토공(土貢)-약재-토산-어량(魚梁)-염소(塩所)-자기소-도기소-읍석성-능묘-누정-역-봉화-제언-사찰의 순서로 수록되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의 가장 큰 특징은 공물 · 조세 · 군역 등 국가의 통치와 방어에 직접적으로 필요한 요소를 총정리해 놓은 점으로, 태종 이후 중앙집권국가체제의 건설을 통한 국가의 직접 통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태종과 세종을 거치면서 조선은 통치체제를 확고하게 정비하여 번영의 시대에 돌입한다. 이에 따라 오랜 전통을 갖고 있는 문화국가로서의 위상을 담은 새로운 지리지의 편찬 필요성이 나타난다. 세조는 집권하자마자 1455년(세조 1)에 양성지(梁誠之)에게 지리지와 지도의 편찬을 명하며, 1463년(세조 9)에 양성지는 정척(鄭陟)과 함께 조선전도인 『동국지도(東國地圖)』를 제작하여 바친다.
지도의 제작이나 정치적 상황 때문에 지체되던 지지의 편찬 사업은 146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되었는데, 1469년(예종1)에 편찬된 『경상도속찬지리지』만이 전해지고 있다. 이 지지는 새로운 『팔도지리지』를 편찬하기 위한 기초 자료로 사용하기 위해 편찬되었다. 하지만 그 자체가 완성품이라기보다는 『세종실록지리지』에서 빠진 부분을 보충하기 위한 내용 위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이 새롭게 편찬된 도별 지지와 기존의 자료를 바탕으로 양성지는 1477년(성종 8)에 새로운 전국 지지인 『팔도지리지』를 완성하지만 현재 전해지고 있지 않다.
양성지의 『팔도지리지』는 중앙에서 자세하게 작성된 것이 아니라 감영에서 올린 지지에 기초하여 편찬되었기 때문에, 1476년(성종 7)에 문사들의 시문 등 문화적인 측면을 첨가하여 편찬하라는 명이 내려진다. 그리고 1481년(성종 12)에 노사신(盧思愼) 등이 양성지의 『팔도지리지』, 우리나라의 시(詩)와 훌륭한 문장을 선별하여 편찬한 서거정(徐居正)의 『동문선(東文選)』을 기초로 하면서 송나라의 『방여승람(方輿勝覽)』과 명나라의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 등의 체제를 참조하여 50권의 『동국여지승람』을 완성한다.
1486년(성종 17)에 김종직(金宗直) 등이 일부 증보 · 수정하여 55권의 1차 수찬본(修撰本)을, 1499년(연산군 5)에 성현(成俔) · 임사홍(任士洪) 등이 2차 수찬본을 편찬한다. 그리고 1530년(중종 25)에 이행(李荇) · 홍언필(洪彦弼) 등이 일부 증보하여 현재 일반적으로 이용되는 55권 25책의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완성한다.
각 고을에 수록된 일반적인 항목은 건치연혁-관원-군명-성씨-풍속-형승-산천-토산-성곽-봉수-학교-누정-궁실-역원-교량-불우-사묘-총묘-고적-명환-인물-제영 등의 순서로 되어 있다. 실질적인 통치에 도움을 주는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던 『세종실록지리지』에 비해 유교적 통치 이념, 문화적 측면을 강조하는 항목이 강화되어 안정기에 들어선 조선 왕조의 자신감이 들어 있다.
이렇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은 1479년(성종 10)에 을해자판(乙亥字版), 1499년(연산군 5)에 계축자판(癸丑字版), 1531년(중종 28)에 계축자판의 활자본으로 간행되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많은 자료가 멸실되자 1611년(광해군 3)에는 목판으로 제작하여 간행하였는데, 현재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것이 이 시기의 것이다.
이러한 간행과 보급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은 국가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가장 표준적인 전국지지가 되었으며, 조선 후기에는 양반의 지식인층 사이에 일반적으로 참고하는 핵심 자료 중의 하나가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개별 고을의 상황에 대해서도 상당히 자세하게 서술하여 놓은 편이라서 개별 고을의 읍지로서도 훌륭한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1500년대를 지나면서 마을 중심의 양반지배체제가 완성되어 안정기에 접어들자, 지방관과 고을 양반들의 합작으로 개별 고을의 상황을 훨씬 더 많이 수록한 단행본의 고을읍지가 편찬되기 시작하였다.
최초의 것은 이자(李耔)가 1507년(중종 2)에 편찬한 경상도 의성의 읍지인 『문소지(聞韶志)』로 알려져 있지만 현재는 전해지지 않아 확실한 내용을 알기는 어렵다. 1581년(선조 14)에는 정구(鄭逑)가 경상도 창령의 읍지인 『창산지(昌山志)』를 편찬했으나 역시 전해지지 않는다.
같은 해에 윤두수(尹斗壽)가 편찬한 황해도의 『연안읍지(延安邑誌)』가 현재까지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단행본의 고을읍지이다. 이어 경상도 함안의 읍지인 『함주지(咸州志)』(정구, 1587), 평안도 평양의 『평양지(平壤志)』(윤두수, 1590)가 연속적으로 편찬되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1600년대에 들어서면 경상도 지역에서 『영가지(永嘉誌)』(안동, 1608), 『동래지(東萊誌)』(1611), 『상산지(商山志)』(상주, 1617), 『일선지(一善誌)』(선산, 1630), 『진양지(晋陽志)』(진주, 1631), 『문소지(聞韶志)』(의성, 1634), 『단성지(丹城誌)』(1640), 『천령지(天嶺誌)』(함양, 1658), 『동경잡기(東京雜記)』(경주, 1669)가 편찬되며, 정확한 연대는 확인되지 않지만 『함안지제요(咸安志提要)』, 『포산지(苞山志)』(현풍), 『성산지(星山志)』(성주) 등도 있다.
전라도 지역에서는 『동복지(同福志)』(미상), 『승평지(昇平志)』(순천, 1618), 『무장읍지(茂長邑誌)』(1636), 『탐라지(耽羅志)』(제주, 1653), 『용성지(龍城誌)』(남원, 1699)가 편찬되며, 충청도에서도 전해지지는 않지만 공주 · 홍산 · 충주 · 홍주의 읍지가 편찬되었다.
강원도 지역에서는 현재까지 전해지는 『수성지(水城志)』(간성, 1632)와 『척주지(陟州志)』(삼척, 1662)가 편찬되었고, 전해지지 않는 연대 미상의 『임영지(臨瀛志)』(강릉), 『통천지(通川志)』, 『의춘지제요(宜春志提要)』(춘천)가 편찬되었다.
경기도에서는 『송도지(松都誌)』(개성, 1648)와 『강도지(江都志)』(강화, 1695)가 전해지고 있고, 연대 미상의 『황려지(黃驪志)』는 전해지지 않는다. 평안도에선 『성천지(成川志)』(1603), 『구성지(龜城志)』(1626), 『강계지(江界志)』(1695), 함경도에서는 『삼강지(三江志)』(삼수, 1681)와 『함산지(咸山誌)』(함흥, 1698)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렇게 단행본의 고을읍지가 편찬되던 시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여파로 향촌사회의 질서가 해이해지면서 새로운 재편의 필요성이 대두되던 시기다. 고을마다 편차가 있지만 대체적인 흐름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고을의 통치에 직접적인 도움을 얻을 목적으로 이루어졌다. 둘째, 임진왜란을 경과하면서 무너진 사회 질서의 복구와 안정을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졌다. 셋째, 고을 양반 세력들이 자신들의 위세를 떨치고 확고하게 기반을 다지기 위해 편찬하였다. 넷째, 고을의 전통과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키워줄 목적으로 편찬되었다. 다섯째, 변경 지방의 읍지들은 군사적인 성격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여섯째, 효제충렬(孝悌忠烈) 등 교화적 성격을 강조한 읍지들이 많았다.
따라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것을 기초로 하면서도 새로운 항목이 광범위하게 설정되었고, 양적 측면에서도 훨씬 많아지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단행본의 개별 읍지는 1700년대와 1800년대에도 지속적으로 편찬되면서 새로운 전국지지나 도별지지의 편찬에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편찬 이후 고을 단위 전국지지의 편찬 시도는 한동안 이루어지지 않았다. 1656년(효종 7)에 유형원(柳馨遠)이 9권 10책의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라는 전국지지를 개인적으로 편찬했지만, 항목과 기본 정보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것을 거의 그대로 따랐다.
다만 첫째, 성씨 · 제영 전체를 삭제하고 누정 등 일부 항목을 다른 항목의 내용에 포함시켰고 둘째, 『신증동국여지승람』이후 변화된 내용을 교정 · 첨가하였지만 많지는 않았으며 셋째, 한전(旱田) · 수전(水田)의 항목을 새로 설정하였지만 내용은 수록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 지지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변화된 사회 · 정치적 체제에 맞는 전국지지 편찬의 첫 번째 시도였다.
국가적 차원에서는 1679년(숙종 5)부터 『신증동국여지승람』을 기초로 하면서도 변화된 상황에 맞는 새로운 전국지지의 편찬이 적극적으로 논의되었다. 하지만 실행되지 못하다가 1699년(숙종 25) 경상도와 강원도에 고을의 읍지를 편찬하여 올리라는 명이 내려진다. 하지만 여러 사회 · 정치적 상황 때문에 끝내 완수되지 못했으며, 1757년(영조 33)에 이르러서야 홍양한(洪良漢)의 건의에 의해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전국지지의 편찬이 적극적으로 시도되었다.
1757년 홍문관에서 8도의 감사(監司)에게 각 고을의 읍지를 만들어 올리도록 명을 내렸고, 1759년(영조 35)을 기준으로 하는 읍지가 수합되어 1765년(영조 41)까지 『여지도서(輿地圖書)』란 이름으로 편찬되었다. 총 55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현전하는 『여지도서』는 39개가 빠진 295개 고을의 읍지와 17개의 영지(營志, 감영 · 병영 · 수영 · 통영) 및 1개의 진지(鎭志, 군사기지)로 이루어져 있다.
각 지지에는 그림식 지도가 함께 수록되어 있고, 일반적으로 진관(鎭管, 군사편제)-사방경계와 서울 · 감영 · 병영 · 수영까지의 거리-방리(坊里, 面과 里 및 戶口)-도로-건치연혁-군명-형승-성지(城池)-관직-산천-성씨-풍속-능침-단묘-공해(公廨)-제언-창고-물산-교량-역원-목장-봉수-누정-사찰-고적-인물-한전(旱田, 밭) · 수전(水田, 논)-진공(進貢)-조적(糶糴, 환곡)-전세-대동(大同, 대동세)-균세(均稅, 균역세)-봉름(俸廩, 봉급)-군병-책판의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조선 전기의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특징을 합해놓은 것과 유사하여 실질적 통치 및 군사 편제에 필요한 정보와 문화적 자긍심을 동시에 수록한 성격을 갖고 있다. 하지만 『여지도서』는 활자본이나 목판본으로 간행되지 못하여 조선 후기 전국 지지의 자료로 광범위하게 이용되지는 않았다.
백과사전인 100권 40책의 『동국문헌비고』가 1769년(영조 45)에 시작되어 1770년(영조 46)에 완성되었다. 여기에는 신경준(申景濬)이 주도하여 편찬한 「여지고(輿地攷)」가 6권에서 22권까지 7책으로 수록되어 있다. 지지의 항목 구성은 고을별이 아니라 주제별로 편제되어 있는데, 역대국계(歷代國界)-군현 연혁-산천-도리(道里, 도로와 거리)-관방 · 성곽-해방(海防)-해로의 순서로 되어 있다.
이는 『강계지(疆界志)』, 『산수경(山水經)』, 『도로고(道路考)』, 『산경표(山經表)』, 『사연고(四沿考), 연안항로』, 『가람고(伽藍考), 사찰』, 『군현지제(郡縣之制)』 등 신경준이 편찬한 주제별 지지와 맥락이 같은 것이다. 『동국문헌비고』는 활자본으로 간행되어 조선 후기 내내 국가와 민간에서 가장 많이 이용된 지지 자료의 역할을 하였다.
이후 1782년(정조 6)에 왕명으로 이만운(李萬運) 등이 9년에 걸쳐 교정 · 증보하여 146권의 『증보동국문헌비고』를 편찬하였지만 활자본으로 간행되지는 못하였다. 1903년(광무 7)에 찬집청(撰集廳)을 설치하여 박용대(朴容大) 등이 편제를 고치고 변화된 일부를 첨가하여 1908년(융희 2)에 250권의 『증보문헌비고』를 편찬하여 활자본으로 간행하였다.
1759년(영조 35)에서 1765년(영조 41) 사이에 편찬된 『여지도서』이후, 고을 단위 전국지지의 편찬에 대한 시도가 정조 · 순조 · 헌종 · 철종 때에 지속적으로 나타나지만 완성되지는 못하였다. 다만 그 과정에서 현재까지 전해지는 많은 고을읍지가 만들어졌으며, 15책의 『관동지』(1828), 71책의 『경상도읍지』(1832), 34책의 『경기지』(18421843), 51책의 『충청도읍지』(18341849), 25책의 『관북지』(1859, 尹定善) 등 도별지지가 국가와 민간에서 편찬되었다. 이러한 도별지지에 수록된 고을읍지의 항목 구성이나 내용은 편차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여지도서』의 것을 따랐다.
병인양요(丙寅洋擾, 1866)와 신미양요(辛未洋擾, 1871)를 거치며 나타난 위기의식으로 전국적인 체제 정비를 위해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명령으로 1871년(고종 8)에 지지의 대대적인 편찬이 이루어진다. 주로 도별로 묶여져 전해지고 있으며, 조선시대의 전국지지 중 가장 방대한 양으로 편찬되었다. 하지만 항목의 구성이나 양적 측면에서 전국적 통일성은 거의 없으며, 기존의 개별읍지를 그대로 베끼거나 일부만 교정한 것이 많다. 이어 1895년(고종 32)과 1899년(광무 3)에도 고을 단위 전국지지의 편찬이 시도되지만 역시 전국적인 통일성이 부족하고 주로 도별지지의 형태로 남아 있다.
조선의 전국지지 편찬은 중앙집권 국가의 성격에 맞게 일반적으로 국가가 주도하였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개인의 지지 편찬이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국가가 편찬한 전국지지나 도별지지를 정리하여 약간 첨가한 수준이며, 대부분은 고을별이 아니라 주제별로 편제하였다. 하지만 김정호(金正浩, 1804~1866년 추정)에 이르러 개인의 전국지지 편찬이 국가의 능력을 넘어서게 되었다.
김정호는 대축척 지도의 제작자로 유명하지만 그의 진정한 목적은 이용자들에게 통치 정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효율적으로 제공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이미지 정보 위주의 지도 제작과 서술 정보 위주의 지리지 편찬을 동시에 진행시켰다.
현재까지 발견된 것에 입각하면 김정호의 첫 번째 전국지지는 순조 때 주로 작업이 이루어진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동여편고(東輿便攷)』2책(1책 결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건치연혁-군명-성씨-산천-토산성곽-관방-봉수-궁실-누정-학교-역원-교량-불우(佛宇)-사묘-고적의 내용을 그대로 베낀 후 바뀌었거나 틀렸거나 새롭게 첨가해야할 내용을 다른 지지와 지도 자료를 통해 깨알 같은 글씨로 교정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1834년(순조 34) 경부터 1840년대까지 영남대학교 도서관 소장 『동여도지(東輿圖志)』20책(3책 결본)을 편찬하였다. 주로 건치(연혁)-[읍호]-[관원]-방면-산천-형승-풍속-호구-전부(田賦)-성곽-군병-역도-교량-창고-곡부(穀溥)-토산-장시-원참(院站)-단유(壇壝)-묘전-사원-전고(典故)의 순서로 이루어져 있는데, 조선 전기와 후기의 전국지지에 수록된 항목을 종합하여 편집하였다.
‘동여도지(東輿圖志)’란 조선의 지도와 지지를 함께 수록하였다는 뜻이지만, 영남대학교 도서관 소장본에는 지지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영국국립도서관 소장 『동여도지』 3책 중 황해도와 강원도 2책은 지도와 지지를 동시에 수록하여 이름에 걸맞게 만들려고 하였으며, 항목의 수도 대폭 줄였다. 하지만 경기도 1책은 다시 지지만 수록하여 김정호가 지도와 지지가 수록된 전국지지를 편찬하려다 포기했음을 엿볼 수 있다.
최성환(崔瑆煥)과 함께 1853년(철종 4)에서 1856년(철종 7) 사이에 편찬된 것으로 연구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여도비지(輿圖備志)』 20책(5책 결본) 역시 지도와 지지를 동시에 수록한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지도는 서울지도와 도별도만 있고 고을지도는 수록되어 있지 않아 지지 중심으로 편제되어 있다.
각 고을에는 크게 건치(연혁)-산천-식화(食貨)-무비(武備)-도리(道里)-사전(祀典)으로 이루어졌고, 각 항목은 여러 가지의 세부 항목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러한 항목의 구성은 다른 전국지지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여러 자료의 수집과 비교 · 검토를 통해 창조적으로 편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최성환이 지지 부분을, 김정호가 지도 부분을 담당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김정호의 『동여도지』를 새로운 체제에 맞게 편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정호의 마지막 지지는 1861년(철종 12) 경부터 사망연도로 추정되는 1866년(고종 3) 경까지 편찬된 『대동지지(大東地志)』 30권 15책이다. 김정호의 친필본은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1권에서 24권까지는 경도와 8도의 고을이 수록되어 있다. 이어 25권은 산수고(山水考), 26권은 국경 방어와 관련된 변방고(邊防考), 27권과 28권은 전국의 육로와 수로를 정리한 정리고(程里考), 29권에서 32권까지는 역사를 정리한 방여총지(方輿總志)로 구성되어 있다.
고을 단위의 전국 지지임과 동시에 주제별 지지까지 통합한 것으로 조선 후기 국가와 개인의 지지 편찬 경향을 종합한 것이다. 하지만 25권과 26권은 이름만 있고 내용이 수록되어 있지 않으며, 평안도 부분은 필체와 체제가 다를 뿐만 아니라 일부는 결본이다.
따라서 김정호는 『대동지지』를 편찬하다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사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의 지지 편찬에서 나타난 지도와 지지의 결합에 대한 시도와 포기는 단지 지지 자체만으로가 아니라 『청구도』나 목판본 『대동여지도』 등 대축척 지도의 제작과 함께 상호 보완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개항기 이후 청 · 일본을 통해 서양의 세계지리 지식이 전해지면서 지지의 편찬 경향에도 변화가 올 수밖에 없었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으로 오횡묵(吳宖默)이 1890년(고종 27) 안팎에 편찬한 『여재촬요(輿載撮要)』를 들 수 있는데, 10권의 필사본과 이를 축약한 5권의 필사본 및 1권의 목판본 등 3개의 종류가 전해진다. 10권으로 된 필사본의 경우 1권에는 서양에서 들어온 태양과 지구의 운행에 관한 천문학과 지구전도 및 대륙별 지지 등이 실려 있다.
2권에는 동국팔역도리표(東國八域道里標)와 조선전도 및 한양경성도, 경성오부도 등을 중심으로 조선 전체와 한양의 지지가, 3권부터 10권까지는 도별로 도별도, 정도표(程道標), 고을지도와 지지가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조선 전체와 한양 및 도별 고을의 지지와 지도는 모두 조선의 전통적인 형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으며, 전도와 도별도는 정상기의 지도 계통, 한양의 지도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계통, 고을지도는 신경준의 지도 계통을 따르고 있다.
따라서 『여재촬요』는 근대적 세계지지와 전통적 한국지지가 결합된 이행기적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이며, 이러한 경향은 구한말에도 지속된다. 그리고 현채(玄采)의 『대한지지』(1899), 이원극(李源兢)의 『대한지지』(1907), 안종화(安鍾和)의 『초등대한지지』(1907) 등 교과서 형식의 지지가 많이 출간되었다.
일제강점기 들어 대세를 이룬 것은 행정단위인 군 단위의 단행본 지지 편찬이다.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조선시대의 고을은 합해지거나 쪼개져서 비슷한 규모의 군으로 재편되었고, 이와 같은 상황을 반영하여 새로운 군지가 많이 편찬되었다. 국립중앙도서관의 경우 소장된 총 578종 1,398책 중 일제강점기에 편찬된 것이 344종(59.5%) 863책(61.7%)이나 차지할 정도로 높은 비율을 점하고 있다.
이들 단행본 군지의 대부분은 조선시대의 지지 내용을 거의 그대로 수록하면서 일제강점기 이후의 변화된 상황을 첨가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내용적 측면에서 경위도의 위치나 기후 및 근대적 측량 성과가 반영된 지도 등 근대적인 것이 추가되는 경향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조선시대의 형식을 기초로 하면서 일제강점기의 상황에 맞는 항목의 추가와 체제의 변화를 주었다. 이러한 단행본의 군지는 고을의 유지들과 군수가 합작하여 편찬한 경우가 많으며, 조선총독부 차원에서 전국지지의 형태로 묶거나 새로운 체제로 정리하지는 못했다.
다만 충청남도 공주 지역에서 활동한 유학자 이병연(李秉延)이 1910년부터 1922년까지 12년 동안 100여 명의 인력을 동원하여 전국 13개 도의 229개 군 가운데 129개의 군을 직접 조사하여 방대한 양의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을 편찬하였다. 편집은 1929년에 완료되었지만 1933년에서 1937년까지 공주의 보문사(普文社)에서 26개의 군과 조선 총설 및 도별 총설의 일부만 목활자본으로 간행되었고, 나머지는 일제의 감시와 재정난 등으로 간행되지 못했다.
광복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시 · 군 · 구, 도 · 광역시 · 특별시 등 지방자치단체의 행정 단위별로 수많은 지지가 편찬 · 간행되었고, 그 수는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또한 대략 1980년대까지 편찬된 시지나 군지를 1990년대 이후 양적 · 질적 측면에서 훨씬 개선된 형식으로 증보 · 개찬하는 경향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지방자치 단체별로 이루어져 전국적인 통일성은 상당히 부족한 편이며, 조선시대처럼 일목요연한 항목과 내용으로 구성된 전국지지의 편찬으로 진행된 경우는 별로 없다.
그중에서 건설부 국립지리원에서 1980년부터 1986년까지 전국지지의 형식으로 편찬한 『한국지지』가 주목된다. 1980년에 『한국지지』(총론)을 시작으로 1984년에 『한국지지』(지방편 1: 서울, 인천, 경기)와 『한국지지』(지방편 2: 강원, 충북, 충남)가, 1985년에 『한국지지』(지방편 3: 부산, 대구, 경북, 경남)가, 1986년에 『한국지지』(지방편 4: 광주, 전북, 전남, 제주)가 연속적으로 편찬되었다.
항목의 구성은 경기도의 경우 1. 지리적 기초와 자연환경, 2. 역사적 배경, 3. 인구성장과 도시발달, 4. 산업과 지역개발, 5. 지역구조와 그 특색, 부록(시군의 연혁, 시군의 면적과 인구, 경인지역의 도서현황)으로 이루어져 있다. 광역의 시와 도 사이에 약간씩의 편차가 있기는 하지만 큰 흐름은 비슷하며, 시군 단위의 전국 지지라기보다는 광역자치단체 전체의 관점에서 주제별로 편찬된 지지의 성격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