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1년(연산군 7) 진사가 되었고, 1504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해 사헌부감찰을 지냈다.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온 뒤 이조좌랑에 승진했지만, 연산군 난정 아래에서의 관직 생활에 환멸을 느껴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자청해 의성현령으로 나갔다.
1506년 중종반정 후에 발탁되어 홍문관 수찬 · 교리 등을 지내다가 1510년(중종 5) 아버지의 상으로 관직을 떠났다. 1513년 복직하여 부교리 · 부응교 · 사간원 사간을 역임하고, 이듬 해 어머니의 상으로 사직했다가 1517년부터 홍문관 전한 · 직제학을 거쳐 부제학에 승진하였다.
그 후에 좌승지로 옮겼다가 다음 해에 대사헌이 되었다. 이 무렵 조광조(趙光祖) · 김정(金淨) 등의 신진 사류들과 일파를 이루어 도학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으나, 그들의 급진적 개혁 정책을 완화하고자 노력하였다.
1518년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의 부사로 북경에 파견되었다. 이 때 정사로 갔던 남곤(南袞)이 병들어 거의 죽게 된 것을 지성으로 간호해 회복하게 했는데, 이 때문에 이자는 기묘사화 후 큰 화를 면할 수 있었다. 1519년 귀국해 한성판윤 · 형조판서 · 우참찬 등에 임명되었다.
이자는 사림파의 한 사람이었으나 성품이 온유하고 교제가 넓어 남곤 · 김안로(金安老) 등의 훈구 세력과도 원만하게 지냈다. 양파의 중간에서 반목과 대립을 해소하고 온건한 정책으로 유도하고자 했으나 급진 사림파의 반발로 실패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사림파가 참화를 입게 되자 이자도 여기에 연좌되어 파직 · 숙청되었다. 그 뒤 음성 · 충주 등지에 은거하여 세상을 등지고 독서와 시문으로 소일하고, 이연경(李延慶) · 김세필(金世弼) · 이약빙(李若氷) 등과 학문을 토론하며 여생을 마쳤다.
효도와 우애가 돈독했고 학문과 수양에 정력을 기울였다. 많은 사평(史評)을 썼으나 일찍 죽어 정리되지 못하였다. 『주자가례』를 독신했으며 자손들에게 그 실천을 유언하였다. 저서로는 『음애일기』와 시문집인 『음애집』이 있다.
『기묘명현록』에 올랐고, 충주의 팔봉서원(八峰書院)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