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문관의 직제학은 도승지가 겸하였다. 제학의 제는 고려 때 학사(學士)를 고친 이름이다.
1392년(태조 1) 7월의 태조신반관제에 따르면 예문춘추관에 정2품의 대학사 1인, 종2품의 학사 2인을 두었는데, 1401년(태종 1) 7월의 관제 개혁 때 예문춘추관이 예문관과 춘추관으로 나뉘면서 학사의 직이 대제학 1인, 제학 1인, 직제학 2인으로 분화한 것이다. 이것은 1362년(공민왕 11) 3월의 관제 개혁 때 예문관에 대제학·제학·직제학을 둔 것과 같다.
예문관의 직제학이 비록 녹관(祿官)이었으나 별다른 직무(職務)가 없어서 직관(直館)과 함께 사관(史官)을 겸임시켜 매일 출근하게 했으며, 대소아문에서 예문관에 보고된 문서를 점검해 예악형정(禮樂刑政)에 관계되는 큰 줄거리를 빠짐없이 기록하게 하였다. 그래서 송의 고사에 따라 시정기(時政記)라 해서 후일의 수사(修史 : 실록 편찬) 자료로 삼았다. 예문관 전임 관원인 봉교(奉敎) 이하로서 춘추관의 기사관(記事官)을 겸하게 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직제학의 정원이 1인으로 감원된 연도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1478년(성종 9) 3월에 홍문관이 예문관에서 분리·독립한 때로 추정되며, 홍문관의 직제학을 도승지가 겸하던 것을 예문관에 옮긴 것도 이 때이다.
한편, 홍문관의 직제학은 홍문관의 전신인 집현전에는 보이지 않고, 1463년(세조 9) 11월에 집현전 대신 홍문관을 설치할 때 직제학 1인을 둔 기록이 보이는데, 이것은 1478년 3월에 홍문관이 예문관에서 분리, 독립할 때 그대로 이어져『경국대전』에 수록된 것이다.
그리고 규장각의 직제학은 홍문관의 부제학(副提學)의 후보자로 천망(薦望)된 사람으로서 임명한다. 이들은 모두 다른 관사에서 겸관이 되고, 지방관이라도 겸임할 수 있다. 이들의 경우 종2품의 관원도 임명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