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희초(熹初), 호는 준암(樽巖). 이극감(李克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세우(李世佑)이다. 아버지는 현감 이자(李滋)이며, 어머니는 광주 안씨(光州安氏)로 사간 안팽명(安彭命)의 딸이다.
성균관 유생으로서, 1508년(중종 3) 왕이 성균관에 행차해 시험할 때 수석으로 뽑혀 『예기』가 하사되었다. 1513년(중종 8) 수석으로 생원에 합격한 뒤 이듬해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호당(湖堂: 독서당)에 뽑혔다.
그 뒤 여러 관직을 거쳐 1518년 공조정랑에 올라 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을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케 하던 제도)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로 조광조(趙光祖)가 유배될 때 형 이약수(李若水)가 동료 유생 150여 명을 이끌고 조광조의 신원을 호소하다 옥에 갇히자, 이조정랑으로서 조광조와 이약수의 사면을 주청하다가 파직되었다.
1537년 다시 기용되어 예조정랑을 거쳐 한산군수로 있으면서 1539년에 연산군과 노산군(魯山君)의 후사(後嗣)를 세울 것과 복성군(福成君)의 신원을 청하다가 잡혀 들어와 삭직당하였다. 그리하여 충주 북촌(北村)에 가서 살면서 스스로 호를 준암이라 하였다.
그 뒤 1543년 경기도의 재상어사(災傷御史)로 파견되었고, 이듬 해 수원부사·종부시정(宗簿寺正) 등을 지냈다. 1547년(명종 2) 사복시정(司僕寺正)으로 재직 중 소윤인 윤원형(尹元衡)·이기(李芑) 등이 정언각(鄭彦慤)의 양재역(良才驛)의 벽서고발사건을 계기로 대윤 일파를 숙청할 때, 대윤 윤임의 인척이라 하여 처형당하고 가산이 적몰되었다.
그 뒤 1570년(선조 3)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어 복직되었고, 몰수당한 가산도 돌려 받았다. 대흥(大興)의 우천사(牛川祠)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