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불린(不磷). 이색(李穡)의 현손이며, 이종학(李種學)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숙묘(李叔畝)이다. 아버지는 이형증(李亨增)이며, 어머니는 조아(趙雅)의 딸이다.
1471년(성종 2)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1475년 예문관의 대교로서 청악음주죄(聽樂飮酒罪)를 범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고신(告身: 관리에게 주던 임명사령장)을 박탈당하였다. 그 뒤 복직되어 1483년 사촌동서인 조익정(趙益貞)의 천거로 헌납이 되었다.
이어 소격서(昭格署)의 영(令)을 거쳐 이듬해에 지평이 되었다. 1490년 장령에 올라 영안도(永安道)의 안접종사관(安接從事官)으로 나갔고, 이듬해 수사헌부집의(守司憲府執義)를 거쳐 1493년 삼척부사로 나갔다. 강원도관찰사 이집(李諿)이 공(公)을 먼저하고 백성을 구휼함에 뜻을 둔 인물이라 상계하여 마침내 대사간으로 승진되었다.
연산군 때에는 홍귀달(洪貴達) 등과 함께 선조의 구신(舊臣)으로 관직에 있으면서 연산군의 난정을 좌시할 수 없다 하여 수차 상소하였으나, 결국 1504년(연산군 10) 유순(柳洵) 등의 탄핵으로 장 100대를 당하고 용궁(龍宮: 경상북도 예천)으로 유배되었다.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귀향하여 학문에 정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