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천(鎭川). 경기도 음죽(陰竹)에 살면서, 관서 중화인(中和人)으로 호서 청안(淸安)에 이주한 김치규(金致奎)와 교제, 참위(讖緯)에 몰두하였다.
1826년 기근으로 인하여 민심이 동요하는 틈을 타 청주북성문괘서사건을 유발하였다. 그 괘서에서 스스로를 강화도 중의 성인도사(聖人道士), 태백산(太白山) 하의 장군원수라 칭하면서 당시의 국정을 비판하였다.
그런데 이는 일반 백성들에게 상당한 반응을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김치규·유치중(柳致仲) 등과 함께 경기도 안성에 있는 유성호(柳性浩)의 집에 숨어 있다가 절도사 이겸회(李謙會)와 안성군수에 의하여 체포되었다.
이 사건이 역모에 관련된 중대한 것인만큼 청주감사 김학순(金學淳)과 병사 이겸회는 파직되고, 괘서는 소각되었다. 김치규와 함께 극형에 처해졌다. 이 사건은 조선 말기 극심한 사회혼란과 정치적 불안에 편승한 참위설의 만연을 보여주는 한 예로 자못 의의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