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사원(士源), 호는 뇌진재(瀨進齋). 이계(李繼)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짐(李瑊)이고, 아버지는 부사 이준도(李遵道)이며, 어머니는 송희빈(宋希贇)의 딸이다.
1583년(선조 1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3년 차지분급종사관(次知分給從事官)으로서 전답 및 춘추종자(春秋種子)의 분급을 균일하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대로 전답을 매점하였다고 하여 의금부의 옥에 갇혔다.
1597년 금교찰방(金郊察訪)으로서 가속을 역리(驛吏)의 집에 두고 개인 농사를 지으면서 수확의 책임을 역리에게 덮어씌움으로 인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599년 부사직으로서 검찰사 유근(柳根)의 종사관이 되어 황해도에 있으면서, 많은 가솔과 비속을 거느리고 민폐를 끼치며 사사로운 일을 관의 권위에 의지하여 촌민들을 억눌러 또 다시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다.
그 뒤 고산찰방, 세자시강원의 문학(文學0}}), 정언(正言)을 거쳐 지평(持平)이 되었다. 정언 때에는 김천석(金天錫)계파의 가계가 미비하다고 탄핵하였다.
이후 1602년 종성부사에 제수되었으나, 그가 사람됨이 거칠고 비속하여 종성과 같은 북방의 거진(巨鎭) 부사로서 직분을 다할 수 없다는 사헌부의 건의로 교체되었다. 1604년 광주목사(光州牧使)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사헌부에서 광주에는 인자하고 근실한 수령이 요구되므로 그는 합당하지 않다고 아뢰어서 교체되었다.
이후에도 상주목사·장흥부사 등의 외관을 전전하였다. 그는 본시 성격이 포악하여 종사관으로 있을 때 국록을 훔쳤다고 형을 받은 뒤 사람들의 천대 멸시를 받게 되자 간당(奸黨)에 의탁하여 자신의 영달을 꾀하려 하였던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