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자정(子淨), 호는 수곡(守谷). 이지(李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참판 이육(李陸)이고, 아버지는 이험(李嶮)이며, 어머니는 정옥(鄭沃)의 딸이다.
1523년(중종 18) 생원으로 알성 문과에 급제, 1525년(중종 20) 승정원주서 재임 시 사관(史官) 겸직이 부적당하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1527년(중종 22) 정언이 되어 어전 조강(御前朝講)에서 당해년의 감시제술과(監試製述科)의 급제자가 성적이 미흡한 점을 들어 인재 양성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이후 지평을 거쳐 병조정랑이 되었다가 사성 장토(張土) 등과 함께 간관(奸官)을 적발하는 임무를 띠고 각 도에 파견되었다. 이듬해 이조정랑이 되었으나 사헌부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파직 이유는 당시 김안로(金安老)에게 아부하는 대간시종들에게 미움을 받은 결과로, 장(杖)·배형(配刑)에 처해졌으나 다음 해 중종의 전지(傳旨)로 배형은 면하였다.
그러나 지평 이임(李任) 등이 사림을 모함하는 사람이라고 탄핵해 결국 부여현 은산역(恩山驛)에 유배되었다. 그 뒤 사면되어 1538년(중종 33) 의정부사인이 되었다. 같은 해 사간이 되어, 조강에서 법을 준수해 중정(中正)의 도(道)로 삼을 것을 주장하였다.
이후 홍문관교리·부응교·집의를 거쳐 이듬 해 시강관(侍講官)으로서 학문의 진작에 대해 논하였다. 이는 기묘사화의 여파로 사림이 한결같이 중죄를 받게 되어, 당시의 신진 사림들이 기존 사림들의 그르침을 살피지 않고 그 학문까지도 그르다 해 학문이 폐하게된 데 연유한 것이다.
1540년(중종 35) 대사간이 되어 궁중의 사치를 지적하고 다음해에도 벼슬길을 바르게 할 것을 상소하였다. 1542년(중종 37)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다음 해 당상문신정시(堂上文臣庭試)에서 재주를 과시, 숙마(熟馬) 한 필을 하사받았다.
개성부유수를 거쳐 1546년(명종 1) 한성부우윤·강원도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사·수사를 통제하는 책임있는 관리로서 군령을 다스리지 못했다는 사간원의 탄핵으로 추고(推考: 죄가 있는 관리를 심문해 징계함.)되었다.
1553년(명종 8) 용양위호군(龍驤衛護軍)이 되었다가 다음 해 동지중추부사로 죽었다. 글씨를 잘 썼으며, 특히 초서·예서에 능했다. 양주 「임유겸묘비(任由謙墓碑)」와 「신자건묘비(愼自健墓碑)」에 그의 글씨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