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은 1인이다. 홍문관의 전신인 집현전에는 설관되지 않았으나 1470년(성종 1) 4월에 예문관으로 하여금 구 집현전제도를 대행하기 위해 예문관의 기구를 대폭 확대하면서 구 집현전직제 중 부제학 이하 부수찬에 이르는 15인을 복설할 때 비로소 정3품의 전한 1인을 둔 기록이 보인다.
이로써 예문관은 종래의 예문관직제와 구 집현전직제의 복합체가 되었다. 경연과 사관제도의 합리적 운영을 위한 예문관의 기구확장은 얼마 뒤에 모순이 드러나기 시작하여 1478년 3월에는 1일 3강제(一日三講制)의 정착으로 경연체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다시 구 집현전제에 의하여 예문관에 박사 등 참하관(參下官) 4인을 증설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분관(分館)의 논의를 유발시켜 구 집현전직제인 부제학 이하 전한·정자(正字)의 각원(各員)을 홍문관 실제 업무가 있는 관직으로 뽑아 옮김으로써 예문관과 홍문관이 완전히 분리, 독립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