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함평(咸平). 자는 중심(仲心). 아버지는 진사 이경갑(李慶甲)이며, 어머니는 함양여씨(咸陽呂氏)로 여경주(呂慶周)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박학다식하였으며, 이덕무(李德懋) 등의 실학자와 교유하였다.
1782년(정조 6) 음서로 돈녕부참봉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조선의 전고(典故)에 밝은 인물로 선발되어 영조 연간에 편찬된 『문헌비고』의 개정작업에 참여하여, 1790년에『증보문헌비고』의 초고를 완성하여 임금에게 바쳤다.
이에 앞서 1783년에는 상서원직장(尙瑞院直長)에 임명되었으며, 1785년부터 1787년까지는 금화현감으로 재직하였다. 1790년에는 강화경력(江華經歷)에 임명되었다. 1796년 당상관으로 승진하여 오위장이 되고 가승지(假承旨)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이 해에 『일성록(日省錄)』에서 정조 즉위 후의 사실을 채록하여 『문헌비고』를 재보완할 것을 명령받고 서유구(徐有榘) 등과 함께 작업에 착수하였으나 이듬 해 죽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 작업은 이만운의 아들 이유준(李儒準)에 의하여 완수되었다.
저서 및 편서로 역사서인 『기년아람(紀年兒覽)』을 비롯하여 『조두록(俎豆錄)』·『풍천음(風泉吟)』·『장릉지(莊陵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