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권 4책. 필사본. 저자에 관해 자세히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 다만 글재주가 있어 여러 번 과거에 응시했으나 번번이 실패하자 일찍이 과거를 포기하고 시골에 묻혀 살면서 후진을 양성하고 경전연구에 전념하였다는 것과 심노암(沈魯巖)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성위인(成位仁)·성언인(成彦仁)·유치온(兪致溫)·김복균(金復均) 등과 교유하였음을 밝힐 수 있다. 서문은 없고, 권두에 손자 긍연(兢淵)이 쓴 발문이 있다. 규장각 도서에 있다.
권1∼7은 모두 시로, 권1에 오언고시 10수, 오언절구 26수, 오언율시 168수, 권2에 칠언배율 1수, 칠언절구 176수, 권3∼7에 칠언율시 928수, 권8은 문(文)으로 서(序) 6편, 기(記) 1편, 서(書) 4편, 제문 6편, 애사 1편, 지록(誌錄) 1편, 잡저 5편 등이 실려 있다.
시는 초야에 묻혀 살면서 느끼는 감회나 절기의 변화에 대한 감회를 읊은 것이 많다. 또한 보광사(普光寺)·대자사(大慈寺) 등 이름난 사찰이나 삼각산·백상루(百祥樓) 등의 명승지나 유적지를 유람하며 지은 것도 여러 수 있다. 「서유일기(西遊日記)」는 개성을 거쳐 국토의 서쪽지방을 유람하면서 그 여정과 감회를 읊은 것인데 20여 수로 되어 있다.
서(序) 가운데 「자서(自序)」는 자신의 생애를 회고하고 호를 ‘만오(晩悟)’로 짓게 된 동기를 밝힌 글이다. 그밖에 친구 유치온이 아버지와 함께 청나라에 갈 때 송별해 지은 것, 다른 사람의 기행문인 「한북성유록(漢北城遊錄)」에 붙인 서문, 일상생활에서 소나무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인식해 만든 송계(松契)와 학문에 뜻이 있는 선비들이 모여 결성한 필계(筆契)에 붙인 서문 등이 있다.
서(書) 가운데에는 송시열(宋時烈)을 학문의 정통으로 높이면서, 조석우(曺錫雨)가 윤증(尹拯)에 대한 제문에서 송시열을 비난한 그의 고조부 조하망(曺夏望)의 문집을 발간하는 행위를 규탄하는 내용이 있다.
잡저에는 불교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보이면서 승려가 되고자 하는 염원을 표시하거나 절을 개조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내도록 권유해 지은 글이 몇 편 있다. 「자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저자는 성리학에 전념했으나, 만년에는 불교에 경도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