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6년 출생했다. 1873년 식년시 역과(譯科)의 한학(漢學)에 3위로 급제했다. 1892년 부산항감리서 역학, 번역관이 되었으며, 1894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가 되었다. 1895년에는 관립외국어학교 부교관, 한성사범학교 부교관을 지냈다. 1896년 평강군수가 되었다가 사직했다. 1899년 학부 편집국 위원으로 임명되어 1907년까지 학부 주사 및 보좌원으로 근무했다. 학부 재직 때인 1899년 학교용 국사교과서인 『동국역사』를 편찬했다.
1900년 장지연과 함께 시사총보사를 광문사로 개칭한 후 『목민심서 』 등 정약용의 저서를 간행했다. 1905년 한성법학교 교장이 되었고, 1906년 대한농회 의원, 국민교육회 보강요원, 1907년 이토히로부미의 후원으로 조직된 대동학회 평의원에 선출, 1908년 기호흥학회 찬무원, 대한중앙학회 평의원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월남망국사』, 『유년필독』, 『(중등교과)동국사략』 등을 저술했다.
1910년 최남선 등과 조선광문회에 참여했으며, 1911년 문예구락부의 편집장이 되었다. 1918년에는 서화협회 발기인, 1919년에는 3·1운동 이후 조선총독부 후원으로 친일단체 육성책의 일환인 대동사문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22년에는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상했다. 같은 해 조선사편찬위원회가 조직될 때 위원으로 임명되어 『조선사』 편찬에 참여했다. 1925년 2월 5일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