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두수는 조선시대 대사헌,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533년(중종 28)에 태어나 1601년(선조 34)에 사망했다. 1577년 사은사로 명에 다녀왔고 연안부사, 전라도관찰사 등 지방관을 지냈으며 직언을 아끼지 않아 파직을 당하기도 했다. 1590년 명의 중요 문헌에 이성계의 가계가 이인임의 후손으로 잘못 기록된 것을 바로잡는 종계변무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자 광국공신 2등에 봉해졌다. 임진왜란 때는 좌의정으로서 이원익, 도원수 김명원 등과 함께 평양성을 지켰고, 정유재란 때는 영의정 유성룡과 함께 난국을 수습했다.
1555년(명종 10) 생원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1558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승문원에 들어간 다음, 검열(檢閱) · 정자(正字) · 저작(著作)을 역임하였다. 1563년 이조정랑에 재임 중 권신(權臣) 이량(李樑)이 아들 이정빈(李廷賓)을 이조좌랑에 천거한 것을 박소립(朴素立) · 기대승(奇大升) 등과 함께 반대하였다. 이 때문에 대사헌 이감(李戡)의 탄핵을 받아 삭직되었다. 그러나 그 해 영의정 윤원형(尹元衡), 우의정 심통원(沈通源)의 계문(啓文: 왕에게 일정한 양식을 갖추어 올리는 양식의 글)으로 무죄임이 밝혀져 수찬에 다시 서용(敍用)되었다.
그 뒤 이조정랑 · 의정부검상 · 사인 · 사헌부장령 · 성균관사성 · 사복시정(司僕寺正) 등을 지내고, 1565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천거로 부응교에 임용된 뒤 동부승지 · 우승지를 거쳐 1576년(선조 9) 대사간에 이르렀다. 이듬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도승지가 되었으나, 이종동생 이수(李銖)의 옥사에 연좌, 아우 윤근수와 함께 파직되었다. 대사간 김계휘(金繼輝)의 주청으로 복직되어 연안부사로 나갔다. 1581년 황해감사의 서장(書狀)에 의해 재령군수 최립(崔岦) 등과 함께 구황(救荒)을 잘했다 하여 옷 한 벌이 하사되었다.
이후 한성좌윤 · 오위부총관 · 형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1587년 왜구가 전라도 지방을 침범해 지역 인심이 흉흉해지자,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해 수사 · 수령의 기강 쇄신과 범죄자 처벌에 노력하였다. 1589년 평안감사를 지내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종계(宗系: 명나라 『태조실록』과 『대명회전』에 이성계의 가계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후손으로 잘못 기록된 것)를 변무(辨誣: 잘못된 것을 바로 잡도록 함)한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이 되어 해원군(海原君)에 봉해졌다.
그 뒤 대사헌 · 호조판서를 역임하고, 1591년 5월 석강(夕講)에서 도요토미[豊臣秀吉]의 답서를 명나라에 알려 진상을 보고할 것인가의 여부에 대해, 병조판서 황정욱(黃廷彧)과 함께 보고할 것을 주장하다가 양사의 합계(合啓)로 정철(鄭澈)에게 당부(黨附)했다 하여 파면되었다. 그리고 건저문제(建儲問題: 세자 책봉의 문제)로 정철이 화를 당할 때 같은 서인으로 연루되어 회령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그 뒤 윤두수의 견해가 타당성이 있음을 안 선조는 공을 인정하는 뜻에서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다시 기용되어, 어영대장 ·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이 해 평양 행재소(行在所)에 임진강의 패배 소식이 전해지자,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자는 주장에 반대하고 우리의 힘으로 최선의 노력을 다하자고 주장하였다. 이 해 이조판서 이원익(李元翼),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등과 함께 평양성을 지켰다. 이듬해 삼도체찰사(三道體察使)를 겸했으며, 1595년 판중추부사가 되었고 해원부원군(海原府院君)에 봉해졌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영의정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난국을 수습하였다. 이듬해 좌의정이 되고 영의정에 올랐으나, 대간의 계속되는 탄핵으로 사직하고 남파(南坡)에 물러났다. 1605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봉해졌다.
평소 온화하고 화평했으나, 큰 일을 당했을 때에는 직언을 아끼지 않았다 한다. 그리고 임진왜란 · 정유재란의 국가적 위기 때에는 적극적으로 극복에 나섰다. 저서로는 『오음유고』 · 『기자지(箕子誌)』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