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휘 ()

유교
인물
조선 전기에, 동지의금부사, 평안도관찰사, 예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중회(重晦)
황강(黃岡)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26년(중종 21)
사망 연도
1582년(선조 15)
본관
광산(光山)
출생지
미상
주요 관직
동지의금부사|평안도관찰사|예조참판
정의
조선 전기에, 동지의금부사, 평안도관찰사, 예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중회(重晦), 호는 황강(黃崗). 아버지는 지례현감(知禮縣監) 김호(金鎬)이며, 어머니는 전의이씨(全義李氏)로 공조정랑(工曹正郎) 이광원(李光元)의 딸이다. 장생(長生)은 그의 아들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일찍이 경서와 사서 등을 폭넓게 읽었으며, 문장에도 뛰어났다. 1549년(명종 4) 식년문과에 을과로 합격해 사가독서(賜暇讀書)에 뽑혔다. 그 뒤에도 벼슬은 올랐지만 오랫동안 사가독서를 하였다.

1557년 김홍도(金弘度)와 김여부(金汝孚)의 반목으로 옥사가 일어났을 때 김홍도의 당으로 몰려 파직되었다가, 1562년 다시 전의 관직인 이조정랑으로 복직되었으나 아버지의 상중이어서 나가지 않았다.

삼년상을 마치고 다시 벼슬길에 올라 첨정·사간(司諫)·집의(執義)·응교(應敎)·전한(典翰)·직제학 등을 역임했고, 1566년 문과중시에서 장원을 차지해 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

1571년(선조 4) 이조참의·예조참의에 제수되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황해도·전라도의 관찰사를 거쳐 공조참판·형조참판과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등을 역임하였다.

1575년 동서 분당 때 심의겸(沈義謙)과 함께 서인으로 지목된 적도 있으나, 당파에는 별로 깊이 간여하지 않고 오히려 당쟁 완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 뒤 평안도관찰사로 있다가 1581년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위한 주청사(奏請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이어서 예조참판에 올라 경연관(經筵官)이 되었다.

우리 나라의 산천·마을·도로·성지 등의 형세와 전술적인 문제점, 농작물의 생산 현황, 각 지방의 전통·연혁·씨족 원류 등을 두루 파악해 기록으로 남겼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이조판서로 추증되었고, 나주 월정서원(月井書院)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국조방목(國朝榜目)』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선조실록(宣祖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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