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사수(士受).
1573년(선조 6) 강릉참봉으로 있을 때 조정에서 6품직으로 승진상신이 있었으며, 1579년에 지평(持平)이 되었다.
1581년에 유화(柳和)와 유온(柳溫) 사이에 벌어진 재산에 관한 소송이 상부기관에서 잘못 처리된 것을 알면서도 그 부당함을 말하지 않았다 하여 언관직에서 물러났다가 1583년에 장령(掌令)에 임명되었다.
태조의 정비 신덕왕후(神德王后)의 태묘(太廟) 배향문제에 대한 논란이 있었을 때, 그가 양사(兩司: 사헌부와 사간원)는 마땅히 부묘(祔廟: 삼년상을 마치고 신주를 사당으로 옮겨 모시는 일)를 청해야 되는데 각(閣)을 세워 제사지낼 것만 청한 점을 논박하자 그의 정연한 이론 앞에 양사는 일괄사표를 제출하였다.
그는 타인의 이목이나 사사로운 사정을 전혀 개의하지 않고 오직 대의명분에 따라 모든 일을 시행해 나가려고 힘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