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거(公擧). 효령대군(孝寧大君)의 5대손이며, 율원군(栗原君) 이종(李徖)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여양군(呂陽君) 이자겸(李子謙)이다. 아버지는 현령 전성군(全城君) 이대(李薱)이며, 어머니는 정종보(鄭宗輔)의 딸이다. 명종비 인순왕후 심씨(仁順王后沈氏)의 외숙이다. 정사룡(鄭士龍)의 문인이다.
1552년(명종 7) 정사룡이 고시관이 되자, 정사룡의 후원으로 성균관 유생으로 곧바로 식년 문과에 응시해 급제하였다. 그리하여 승정원주서가 되고, 1555년 역시 정사룡의 추천으로 독서당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의 진작을 위해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케 하던 제도)하였다.
1558년 병조정랑이 되고, 이어서 그 해 사간원헌납·홍문관수찬·교리·사헌부지평·병조정랑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홍문관으로 다시 옮겨 부응교·응교를 지내고, 척신 윤원형(尹元衡)의 전횡을 견제하려는 명종에게 중용되어 승정원동부승지를 거쳐 홍문관부제학으로 승진하였다.
1560년 사간원대사간이 되고, 이어 병조참지·예조참판·동지중추부사·이조참판·동지성균관사에 올랐다. 과거에 급제한 지 8년만에 당상관에 올랐다. 이량은 명종의 신임을 바탕으로 이감(李戡)·신사헌(愼思獻)·권신(權信)·윤백원(尹百源) 등과 결당해 세력을 기르고 정치를 농단하였다.
한때 세력을 더욱 키우고자 자기 당파의 김명윤(金命胤)을 재상으로 삼기 위해 우의정 이준경(李浚慶)의 사직을 상소하기까지 하였다. 축재에도 힘써 이량의 집 앞은 시장과 같았다 한다. 당시 사람들은 이량을 윤원형·심통원(沈通源)과 더불어 3흉(凶)이라 불렀다. 이에 명종도 이를 무마하기 위해서 평안도관찰사로 내보냈다.
그러나 1562년 다시 공조참판 겸 홍문관제학에 중용되고 이조참판에 제수되었다. 이량은 더욱 무리를 늘려 세도가 절정에 달하였다. 이어 예조판서·의정부우참찬·공조판서를 역임하고 이듬 해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에 사림이 이량의 비리를 폭로하고 비판을 가하자, 1563년 몇몇 무리들과 모의해 박소립(朴素立)·기대승(奇大升)·허엽(許曄)·윤두수(尹斗壽)·윤근수(尹根壽)·이산해(李山海) 등 사림을 제거하려 하였다.
그러나 조카인 심의겸(沈義謙)에게 발각되고, 기대항(奇大恒)의 탄핵으로 그 무리와 함께 삭탈관직되었다. 이어서 평안도 강계로 귀양가서 그곳에서 죽었다.
초기에는 정사룡·김홍도(金弘度)·김계휘(金繼輝) 등과 교유했고, 세도를 펴면서는 정유길(鄭惟吉)·고맹영(高孟英)·이령(李翎)·김백균(金百鈞) 등이 모두 당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