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재란 ()

조선시대사
사건
임진왜란 중 강화 교섭의 결렬로 왜군이 정유년(1597)에 다시 침략한 전쟁.
이칭
이칭
정유재침
사건/전쟁
발발 시기
1597년(선조 30)
종결 시기
1598년(선조 31)
관련 국가
조선|명나라|일본
관련 인물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정유재란(丁酉再亂)은 임진왜란 중 강화 교섭의 결렬로 왜군이 정유년(1597)에 다시 침략한 전쟁이다. 명 · 일 강화 교섭이 1596년 9월 그 기만성이 드러나면서 결렬되었고, 1597년에 왜군이 14만 병력으로 침략하였다. 전라도 점령을 1차 목표로 하였으며 칠천량해전, 남원전투, 황석산전투, 전주 함락 등 일본군이 승리하다가, 명나라군의 반격이 시작되어 9월 직산전투, 1598년 사로병진작전으로 울산, 사천, 순천을 동시에 공격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전쟁이 종결되었다.

정의
임진왜란 중 강화 교섭의 결렬로 왜군이 정유년(1597)에 다시 침략한 전쟁.
배경

명나라와 일본 간에 진행되던 강화 교섭이 1596년 9월 오사카회견〔大阪會見〕에서 그 기만성이 드러나면서 결렬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요구한 화평 조건 7개조에는 명 황녀를 후비(后妃)로 보낼 것, 조선 남부 4개도를 일본에 할양할 것 등 명나라와 조선이 용납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이로 인해 교섭을 담당한 심유경 등이 교섭 조건을 숨긴 채 명 황제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동시에 기만하면서 무리하게 이어 오다 파탄에 이르렀다. 분노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재차 조선 침략을 위한 군사를 편성하였다.

경과 및 결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다시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1597년 2월 21일, 14만 병력을 편성하였다. 1596년 9월, 강화 교섭이 결렬된 이후에도 조선은 전쟁을 막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는데, 통신사를 통해 일본 측과 교섭을 유지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김응서 간의 협상을 진행하는 한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사명대사 간의 협상도 진행되었는데, 조선의 왕자를 일본으로 보내라는 요구 등을 조선이 거절하자 결국 재침략이 시작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 1차 목표가 호남 지방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본격적인 침략은 해로와 육로를 통해 이루어졌는데, 해로는 6월 19일부터 안골포 · 가덕도에서 해전이 시작되어 7월 16일 칠천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괴멸 수준에 이르는 패배를 하게 되었다.

육로로 진격한 일본군은 남원전투, 황석산전투, 전주 함락 등 승승장구하였으나, 9월 7일 직산전투에서 명군이 일본군을 격퇴함으로써 서울로 북상하지 못하였고, 남해안에서는 9월 16일 명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격퇴시키면서 제해권을 되찾았다. 한편, 전라도를 목표로 한 이 전쟁은 철저한 전라도 지역 유린으로 이어졌으며, 남원 · 영광 · 진원 · 금구 · 김제 등 수만 명에 달하는 ‘코베기’가 자행되었다.

일본군의 대대적인 침략에 명나라는 양호(楊鎬)에게 4만여 군사를 이끌고 권율의 1만여 군사와 합세하여 5만여 군사로 12월, 울산왜성(도산성)을 공략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에 사로병진작전(四路竝進作戰)을 전개하였다.

동로의 마귀(麻貴)가 울산을 공격, 중로의 동일원(董一元)이 사천을 공격, 서로의 유정(劉綎)과 수로의 진린(陳璘)이 순천왜교성을 수륙 양면으로 공격하였다. 치열한 전투 중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면서 일본군들이 철군하였고 전쟁은 종결되었다.

의의 및 평가

조선 국토가 황폐하여 경작지가 3분의 1로 줄었으며, 기근과 질병 등으로 농민층의 생활이 참담한 지경에 이르렀다. 또한 노비문서 망실(亡失), 전시 중 납속책(納粟策) 등의 영향으로 신분 체제가 크게 동요되었다.

문화유산의 손실이 컸는데, 궁궐과 사찰 등이 소실되고, 각종 서적 및 작품들을 약탈해 갔다. 일본은 도자기 기술자들이나 문인 등 조선에서 잡아간 포로들로 인해 기술적, 학문적 부흥을 보게 되었다. 명나라는 국력 소진으로 멸망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여진족의 성장으로 명 · 청 교체기를 맞게 되었다.

참고문헌

단행본

허남린 외, 『처음 읽는 정유재란 1597』(민속원, 2019)
北島万次, 『임진왜란 연구의 재조명』(김문자·손승철 엮음, 경인문화사, 2019)
『한국의 대외관계와 외교사-조선편-』(동북아역사재단, 2018)
『한국군사사』(육군본부, 2012)
조원래, 『임진왜란사 연구의 새로운 관점』(아세아문화사, 2011)
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역사비평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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