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시응(時應), 호는 매은당(梅隱堂),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아버지는 박춘무(朴春茂), 어머니는 우봉이씨(牛峯李氏)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 박춘무와 조헌 등이 주도하여 일으킨 의병에서 선봉이 되었다. 청주성전투와 진천전투에서 활약하였다.
일본군은 한성과 평양성까지 침략하였지만 군량을 확보하기 위해 곡창지대인 호남으로 진격하고자 하였다. 청주성은 호남으로 가기 위한 거점이었기 때문에 조선과 일본의 군사가 치열하게 공방전을 벌였다. 조헌과 영규대사는 서문을, 박춘무는 남문을 공격하였는데, 박동명은 박춘무 의병진에서 활동하였다. 1592년 7월 하순에 시작하여 8월 1일 청주성을 탈환하였다.
청주성에서 퇴각한 일본군은 진천을 점거하고 있던 군사에 합류하였는데, 박춘무 의병진은 곧 진격하여 진천성을 포위하였으나 수적 열세로 공격하지 못하고 있다가 남쪽의 포위를 풀어 퇴로를 열어 준 후 공격하여 일본군을 격퇴시켰다. 이로써 진천지역까지 수복하는 전공을 세웠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1599년 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에 제수되었다. 1607년 사간원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이후 울진현감에 제수되었고 1617년 제주판관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못하였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맏아들 박홍원에게 의병을 일으키도록 하여 반란군 토벌에 공을 세웠다. 그 후 태안군수를 역임하였고, 절충장군인 충청도수군 우후로 있다가 1631년 가선대부 공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증직되었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었고, 1652년 자헌대부 공조판서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추증되었다. 1708년(숙종 34)에 정려가 세워졌고, 1899년(고종 35) 충경이란 시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