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지원(至元), 호는 화천당(花遷堂)이다. 박춘무의 집안이 청주 지역에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은 증조할아버지 박의륜(朴宜倫) 때이다. 이후 지역의 세력가와 혼인 관계를 맺으며 집안이 성장하였다. 할아버지는 박곤손(朴坤孫), 아버지는 진사 박기정(朴箕精)이다. 박기정은 경주김씨 사이에 5남 3녀를 두었다. 맏형 박춘영(朴春英)은 1548년(명종3) 문과 급제, 둘째 형 박춘화(朴春華)도 사마시에 입격하였다. 동생 박춘번(朴春蕃)은 임진왜란 때 박춘무와 함께 종군하였다. 박춘무의 장남 박신명(朴新命)은 선전관을 지냈고, 아버지를 따라 종군한 차남 박동명(朴東命, 1575~1636)은 태안군수를 지냈다.
박춘무가 청주 지역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한 것은 증조할아버지 이후 닦아온 지역 기반에 힘입었다. 특히, 아버지 박기정 대에 학문과 사회경제적으로 집안이 일어났다.
박춘무는 토정 이지함의 문인이다. ‘화천당(花遷堂)’이라는 박춘무의 호도 이지함과 관련이 있다. 동생 박춘번과 함께 거처를 이지함이 있었던 청주 산동(山東)의 화천(花川)으로 옮기고, 이를 기념해서 화천당이라는 당호(堂號)를 지었다.
박춘무는 조헌(15441592)과 1592년 8월 2일 청주성 수복을 이끌었다. 이 승리는 임진왜란 초기 육상에서 거둔 최초의 승리였다. 박춘무와 조헌을 두 수반으로 호서의병이 구성된 계기는 김천일 의병진의 발의로 마련되었다. 김천일 의병진이 전라도 나주에서 창의하여 1592년 6월 중순에 경기도 수원까지 북상하였고, 연합작전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때 김천일 의병진의 종사관 송제민(宋齊民, 15491602)이 파견되어 소모(召募) 활동을 전개하였다. 송제민, 조헌, 박춘무는 모두 이지함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당시 박춘무의 거주지는 청주 복대리(福臺里: 지금의 청주시 흥덕구 복대동)였다. 의병진은 청주성을 수복하기 위해서 7월 초 이곳에서 출정식을 하였다. 박춘무의 의병진 규모는 대략 1,000여 명 정도로 추정된다. 이때 종사관으로 활약한 사람이 벽오(碧梧) 이시발(李時發)과 한혁(韓赫)이다.
조헌은 서문을 공격하고 박춘무는 남문을 공격하여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이때 조헌은 좌의대장, 박춘무는 우의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송제민, 조헌, 박춘무의 연합작전은 청주성 하나에 그치지 않았다. 청주성 싸움을 시작으로 좌의대장은 황간 영동 이남의 적과 싸우고, 우의대장은 금강 이북의 적과 싸우기로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금산이 위급하여 조헌의 좌의대는 700여 의병을 거느리고 금산으로 달려가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모두 전사하였다.
한편, 박춘무는 진천(鎭川)으로 나아가서 진천전투에서 승리하였다. 병사를 진천으로 옮겨 적을 열흘이나 포위했는데, 충청도관찰사 윤국형(尹國馨)이 비밀리에 명령을 내려 지원병을 보내지 않았다. 힘이 부친 박춘무가 포위를 풀려고 하자 지역민이 와서 만약 포위를 풀면 백성들이 왜군에게 살육을 당할 것이라 호소하였다. 박춘무는 그날 밤 남쪽의 포위망을 풀어 왜적이 달아나게 하였고, 후에 병사들로 하여금 왜적을 추격하도록 하여 진천 일대를 안정시켰다. 1597년 4월 임천(林川) 군수에 나갔다가 스스로 사직하였다. 1598년 4월에는 첨지중추부사겸오위장(僉知中樞府事兼五衛將)에 임명되었다.
박춘무는 이지함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호서 및 호남 지역에서 이산보(李山甫)와 더불어 그 문하를 대표할 만한 학자 중 한 명이다. 1895년(고종 32) 11대손 문규(文圭)가 박춘무의 시문을 엮어 편집, 간행한 『화천당집(花遷堂集)』이 있다.
참찬(參贊)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민양(愍襄)이다. '박춘무 전장기적비(朴春茂戰場紀蹟碑)'가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2가 중앙공원 내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