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홍주(洪州). 초명은 제민(濟民). 자는 사역(士役) 또는 이인(以仁), 호는 해광(海狂). 현감 송기손(宋麒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감찰 송구(宋駒)이고, 아버지는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 송정황(宋庭篁)이다.
이지함(李之菡)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글재주가 뛰어났다. 호방한 성격에 구속을 싫어하여 벼슬을 하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산룡(梁山龍)·양산숙(梁山璹) 등과 의병을 일으켜 김천일(金千鎰)의 막하에서 전라도 의병조사관으로 활약하다가 이듬해 다시 김덕령(金德齡)의 의병군에 가담하였다.
김덕령이 옥사하자 종일토록 통곡하고 『와신기사(臥薪記事)』를 저술하였다. 또, 척왜만언소(斥倭萬言疏)를 올려 왜적을 물리칠 여러 방안을 피력하였으나 이것이 감사의 미움을 사게 되어 이후 무등산에 은거하면서 세상을 잊고 살았다.
1789년(정조 13)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추증되었고, 광주의 운암사(雲巖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해광유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