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열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 이조정랑, 황주목사, 대사성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열지(悅之)
남곽(南郭), 봉촌(鳳村)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64년(명종 19)
사망 연도
1622년(광해군 14)
본관
반남(潘南)
출생지
한양
주요 관직
대사성
내용 요약

박동열은 조선 후기 이조정랑, 황주목사, 대사성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정치적으로 서인 측이었다. 이조정랑 등 중앙의 요직을 역임하였지만, 황주목사로서 탁월한 성과를 보여 주기도 하였다. 1613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를 적극적으로 반대하다 동생 박동량, 상촌 신흠과 함께 옥에 갇히는 등 고초를 겪었다.

정의
조선 후기 이조정랑, 황주목사, 대사성 등을 역임한 문신.
가계 및 인적 사항

본관은 반남(潘南;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이고, 자는 열지(悅之), 호는 남곽(南郭) · 봉촌(鳳村)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박조년(朴兆年), 할아버지는 사간원 사간 박소(朴紹)이다. 아버지는 대사헌 박응복(朴應福), 어머니 선산임씨는 좌승지 임구령(林九齡)의 딸이다. 부인 정부인(貞夫人) 고령신씨는 동지중추부사 증판서 신벌(申橃)의 딸이다.

3남 2녀를 두었다. 큰아들 박호(朴濠)는 남평현감(南平縣監)을 지냈고, 상촌(象村) 신흠(申欽)의 딸과 결혼하였다. 둘째 아들 박황(朴潢)은 사헌부 대사헌을 지냈고, 영의정 홍서봉(洪瑞鳳)의 딸과 결혼하였다. 셋째 아들 박정(朴渟)은 목사 송일(宋馹)의 딸과 결혼하였다. 혼맥이나 가계로 보아서 정치적으로 서인에 속하였다.

동생 박동량(朴東亮)선조의 딸 주1의 시아버지이다. 선조가 죽기 전, 영창대군을 부탁한 고명칠신(顧命七臣) 중 한 사람이다. 박동량의 둘째 아들 박의(朴倚)도 신흠의 딸과 결혼하였다. 박의의 아들이 박세채(朴世采)이다.

주요 활동

1585년(선조 18) 진사가 되었으며, 1594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성균관 전적주2되었다. 이어 정언 · 병조좌랑 등을 지냈다. 1597년 영변판관(寧邊判官)을 지냈다. 1601년 홍문관 수찬 · 교리를 거쳐 이조좌랑과 정랑에 올랐다. 그해 가을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의주(義州)에 다녀왔다. 1602년 검상(檢詳) · 사인(舍人)을 거쳐 사성(司成) · 상례(相禮) · 주3를 역임하였다. 통정계(通政階)에 올랐다.

뒤이어 황주목사로 나갔느데, 주4을 고르게 하고 민폐를 없애는 등 선정을 베풀어 지역민의 칭송이 높았다. 지역 노인들이 100년 내 이렇게 좋은 목사가 없었다는 말을 하였다. 어사(御使)의 추천으로 옷감을 하사받았다. 1606년 예조참의 · 동부승지 등을 지내고 우부승지에 올랐다. 1607년 9월 황해도관찰사로 나갔고, 다음해 형조참의가 되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충주목사가 되고 이어서 대사성이 되었다.

이듬해 정인홍(鄭仁弘)이황(李滉)문묘에 배향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소를 올렸다. 이에 분격한 성균관 유생들이 정인홍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 말을 듣고 광해군이 크게 노해 주동자를 죄주려 하였다. 그러자 성균관 유생들은 다투어 서로 죄를 청한 후에 성균관을 비우고 나와 버렸다. 박동량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서 광해군에게 “선비를 예로 부를 수는 있어도 위압하여 다스릴 수는 없다”고 극언하였다. 그는 예조참의에 제수되었지만 조정을 나와 자진해 나주목사로 나갔다.

1613년 주5)이 일어나자 이를 적극적으로 반대하다 박동량, 신흠과 함께 옥에 갇히게 되었으나, 마침 중풍으로 석방되었다. 하지만 이로부터 10년간 고생하다가 결국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원전

「관찰사박공신도비명(觀察使朴公神道碑銘)」(신흠, 『상촌고(象村稿)』 권27)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선조실록(宣祖實錄)』
주석
주1

조선 선조의 딸(1590~1660). 인빈(仁嬪) 김씨(金氏)의 소생이며, 금양위(錦陽尉) 박미에게 하가하였다. 아들은 박세교(朴世橋)이다.    우리말샘

주2

추천의 절차를 밟지 않고 임금이 직접 벼슬을 내리던 일.    우리말샘

주3

국가 의례를 관장하던 통례원(通禮院)에 소속된 정3품 당하관.    우리말샘

주4

국가나 공공 단체가 특정한 공익사업을 위하여 보수 없이 국민에게 의무적으로 책임을 지우는 노역.    우리말샘

주5

광해군 대에 광해군의 계모가 되는 인목대비를 폐하기 위해 한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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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이정철(안동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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