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규(靈圭)는 충청남도 공주 출신으로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속성은 박씨(朴氏)이다. 법호(法號)는 기허(騎虛), 법명(法名)은 영규(靈圭)이다. 영규는 계룡산 갑사(甲寺)에서 출가하였고, 청허 휴정(淸虛休靜, 1520∼1604)의 법을 전해 받았다.
영규가 공주 청련암(靑蓮庵)에 있을 때인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그는 3일 동안 통곡한 뒤 충청도에서 800여 명의 의승군을 모았다. 당시 그는 “우리들이 떨쳐 일어남은 조정의 명령이 있어서가 아니다. 만일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는 자는 우리 군에 들어오지 말라”라고 했다고 한다.
영규가 이끄는 승군은 의병장 중봉(重峯) 조헌(趙憲, 1544∼1592)을 따르는 700 의병 및 관군과 함께 청주성을 공격했다. 이 청주전투에 대해 당시 실록에서는 "충청감사 윤선각(尹先覺)이 청주로 진격하여 성을 포위하자 적군 600명이 나와서 포를 쏘아댔습니다. 공주에 있던 승려 영규가 승군 800명을 거느리고 함성을 지르며 성으로 돌입하자 아군이 승세를 타고 적의 수급 51과를 참획하였는데 남은 적은 밤을 틈타 도망쳤습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8월 초 청주성을 수복할 때 영규가 이끈 의승군의 공적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이어 조헌이 전라도로 향하는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의 군대를 공격하려 하자, 영규는 관군과의 연합 작전을 위해 공격 시기를 조금 늦추자고 하였다. 그러나 조헌이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자 영규는 그를 혼자 죽게 할 수 없다고 하며 금산전투에 참가하였다. 조헌의 의병과 영규의 의승군은 1592년 8월 18일 금산전투에서 왜군과 싸우다 모두 전사했다.
선조는 청주성 전투의 승전 소식을 듣고, 영규에게 당상의 벼슬과 옷을 내렸다. 하지만 영규는 하사품이 도착하기도 전에 금산전투에서 순국(殉國)하였다. 청주성 전투와 금산전투에서 승장 영규의 활약은 의승군의 충정과 기백을 조야(朝野)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영규는 금산의 종용사(從容祠)에 제향되었다. 훗날 그의 문도(門徒)인 대인(大仁) 등이 금산 남쪽 진락산(進樂山) 기슭에 영규의 영정을 봉안한 진영각(眞影閣)과 비를 세웠다. 또한 1738년 영규는 밀양 표충사에 청허 휴정, 사명 유정(四溟惟政, 1544∼1610)과 함께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