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도의 주장(主將)인 절도사의 막료로서 주장을 보필한 까닭에 아장(亞將: 副將)이라고도 한다.
남병사(南兵使: 함경남도병마절도사)를 제외한 전임(專任)절도사 밑에 두었으며, 병마절도사에 소속된 종3품의 병마우후(兵馬虞候)와 수군절도사에 소속된 정4품의 수군우후(水軍虞候)로 구분되고, 임기는 720일(2년)이다.
조선 초기에는 중앙군의 군령을 맡은 삼군진무소(三軍鎭撫所)나 오위진무소(五衛鎭撫所)의 도진무(都鎭撫)가 있었듯이, 왕명을 받들어 외방에서 군사를 지휘하는 장수인 병마도절제사, 수군도안무처치사(水軍都安撫處置使)의 밑에도 도진무를 두었다.
1466년( 세조 12)의 관제 개혁에서 병마도절제사도진무는 병마우후, 수군도안무처치사도진무는 수군우후로 각각 개칭되었다. 이로부터 도원수 · 원수 등으로 출정하는 장수 밑에서 군령을 담당하는 직책의 호칭 역시 도진무에서 우후로 바뀌게 되었다.
급록(給祿)은 함경북도 · 평안도의 병마우후에게만 있었다. 이는 양계(兩界)의 병마절도사와 마찬가지로 그 우후 또한 중시된 데다가 우후의 임용에 있어 도진무 때 형성된 규정이 계속 중용된 데서 연유한다.
즉, 도진무는 그 장수에 의하여 천거되어 임명받았다. 그러나 양계의 도진무는 보통 정3품의 상호군급으로 임명하였고, 다른 도진무들은 잡직거관자(雜職去官者)로 임명하였다. 그러다가 1457년에야 무재(武才)가 있는 전함조사(前銜朝士)로 자격을 규정해 전함별좌(前銜別坐)의 예로 서용하게 되어, 원래 양계 도진무에게만 급록되었다.
우후는 절도사를 도와 군기(軍機)에 참여하고 군령을 전달하며 군사를 지휘하는 외에 절도사를 대신해 군사 훈련이나 무기 · 군장 점검을 위해 도내를 순행하였다.
군자(軍資)를 관리하는 등의 임무를 맡았으며, 절도사 유고시에는 임무를 대행하였다. 따라서, 우후가 도내를 순행하다가 수령들과 회좌(會坐)할 때에는 당상수령(堂上守令)이 있어도 가장 높은 좌차(座次)를 차지하였다.
조선 후기 지방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으로서 1627년( 인조 5) 각 도를 3∼5영(營)으로 구분해 영장(營將)을 설치한 뒤 제도적으로 개편하는 과정에서 중군(中軍)을 두어 절도사 밑에서 영장을 관할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전임 절도사의 중군은 우후가 겸하고 관찰사 겸임의 절도사 밑에는 중군만을 두도록 되었으며, 대개 병마절도사의 중군인 병마우후가 영장을 호령하게 되었다. 우후는 1895년( 고종 32) 도제가 폐지됨에 따라 절도사와 함께 혁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