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몰면서 창을 사용하여 목표물을 찌르는 동작으로 평가하였다. 조선시대는 무과 및 내금위(內禁衛)·별시위(別侍衛)·친군위(親軍衛)·갑사(甲士)·대졸(隊卒)·팽배(彭排) 등의 취재(取才)에 기창을 시험하였다.
시험내용은 말을 몰면서 번갈아가며 왼쪽과 오른쪽 겨드랑이에 창을 끼고서 차례로 세 개의 허수아비를 찌른 뒤, 왼쪽 오른쪽으로 돌아보면서 창으로 뒤를 가리키고 나서 돌아오는 것이었다. 시험에서는 정확성과 자세를 평가하였으며, 창을 목표물에 정확히 맞혀도 말을 빨리 몰지 않거나 말채찍을 놓치면 점수를 주지 않았다.
허수아비 사이의 거리는 각각 25보, 창의 길이는 15척5촌이었다. 세종 때에는 실전처럼 두 사람이 서로 말을 달리면서 착창세(着槍勢)·배창세(背槍勢)로 겨루도록 하여 시험하였으나, 위험이 많고 등급을 매기기 어렵다는 이유로 허수아비를 사용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