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승은 조선 전기 성균관 대사성, 대사간, 공조참의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자는 명언, 호는 고봉, 존재, 시호는 문헌이다. 1527년에 출생하여 1572년 사망했다. 1558년 문과에 응시하기 위하여 서울로 가던 중 김인후, 이항 등과 만나 태극설을 논하였다. 1558년 「천명도설」을 얻어 보고 서울에 와 있던 이황을 찾아가 사단칠정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그 뒤 12년에 걸쳐 이황과 서신을 교환하였다. 1559년에서 1566년까지 8년간 이루어진 사칠논변(四七論辨)은 조선유학사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기대승은 광주의 월봉서원에 제향되었다.
전라남도 나주 출신.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峯) · 존재(存齋). 아버지는 기진(奇進)이고, 어머니는 강영수(姜永壽)의 딸이며,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기준(奇遵)이 그의 계부(季父)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이황과의 서신 교환을 통하여 조선유학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칠논변(四七論辨)을 전개하였다.
1549년(명종 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558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승문원부정자와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을 거쳐 1563년 3월 승정원주서에 임명되었다. 그 해 8월 이량(李樑)의 시기로 삭직되었으나, 종형 기대항(奇大恒)의 상소로 복귀하여 홍문관부수찬이 되었다. 이듬 해 2월 검토관이 되어 언론의 개방을 역설하였다.
1565년 병조좌랑 · 이조정랑을 거쳐, 이듬 해 사헌부지평 · 홍문관교리 · 사헌부헌납 · 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 · 사인(舍人)을 역임하였다. 1567년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고, 그 해 선조가 즉위하자 사헌부집의가 되었으며, 이어서 전한(典翰)이 되어서는 조광조(趙光祖) · 이언적(李彦迪)에 대한 추증을 건의하였다.
1568년(선조 1) 우부승지로 시독관(侍讀官)을 겸직했고, 1570년 대사성으로 있다가 영의정 이준경(李浚慶)과의 불화로 해직당했다. 1571년 홍문관부제학 겸 경연수찬관과 예문관직제학으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72년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임명되었으며, 대사간 · 공조참의를 지내다가 병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던 도중에 고부(古阜)에서 객사하였다. 종계변무의 주문을 지은 공으로 광국공신 3등에 책록되었고 덕원군(德原君)에 봉해졌다.
1558년 문과에 응시하기 위하여 서울로 가던 중 김인후(金麟厚) · 이항(李恒) 등과 만나 태극설(太極說)을 논하였고,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얻어 보게 되자 이황을 찾아가 의견을 나누었다. 그 뒤 이황과 12년에 걸쳐 서신을 교환하였고, 그 가운데 1559년에서 1566년까지 8년 동안에 이루어진 사칠논변(四七論辨)은 유학사상 지대한 영향을 끼친 논쟁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이황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반대하고 “사단칠정이 모두 다 정(情)이다.”라고 하여 주정설(主情說)을 주장했으며,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수정하여 정발이동기감설(情發理動氣感說)을 강조하였다. 또한 이약기강설(理弱氣强說)을 주장하여 주기설(主氣說)을 제창함으로써 이황의 주리설(主理說)과 맞섰다.
그는 기묘명현인 조광조의 후예답게 경세택민(經世澤民)을 위한 정열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정치적 식견은 명종과 선조 두 왕에 대한 경연강론(經筵講論)에 담겨 있다. 이 강론은 『논사록(論思錄)』으로 엮어 간행되었으며, 그 내용은 이재양민론(理財養民論) · 숭례론(崇禮論) · 언로통색론(言路通塞論) 등이다.
그는 학행(學行)이 겸비된 사유(士儒)로서 학문에서는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에서 이황과 쌍벽을 이루었고, 행동에서는 지치주의적(至治主義的)인 탁견을 왕에게 아뢰었다. 제자로는 정운룡(鄭雲龍) · 고경명(高敬命) · 최경회(崔慶會) · 최시망(崔時望)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논사록』 · 『왕복서(往復書)』 · 『이기왕복서』 · 『주자문록(朱子文錄)』 · 『고봉집(高峯集)』 등이 있다.
광주의 월봉서원(月峰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헌(文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