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자경(子敬), 호는 복재(服齋)·덕양(德陽). 아버지는 응교(應敎) 기찬(奇禶).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다.
1513년(중종 8)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급제해, 사관(史官)을 거쳐 홍문관정자에 임명되었고, 박사를 역임한 뒤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스승 조광조의 노선을 견지했으며, 사경(司經)으로 있을 때에는 임금에게 효제(孝悌)의 도리를 다할 것을 건의하였다.
1516년 저작(著作)으로 천문이습관(天文肄習官)을 겸했으며, 검토관(檢討官)·수찬(修撰)·검상(檢詳)·장령(掌令)·시강관(侍講官)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는 이성언(李誠彦)이 임금을 속이고 부정을 저질렀다 하여 이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고, 또한 당시 대각(臺閣)이 이를 묵인하였음을 논박해 훈구파(勳舊派)인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으로부터 질시의 대상이 되었다.
1519년 응교가 되어 마침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를 위시해 김식(金湜)·김정(金淨) 등과 함께 하옥되고, 이어 아산으로 정배되었다가 이듬 해 죄가 가중되어 다시 온성으로 이배되었다. 어머니상을 당해 고향에 돌아갔다가 1521년 송사련(宋祀連)의 무고로 신사무옥(辛巳誣獄)이 터져 다시 유배지에 가서 교살되었다.
시에도 능해 『해동시선』·『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등에 시가 수록되어 있다. 온성의 충곡서원(忠谷書院), 아산의 아산서원(牙山書院), 고양의 문봉서원(文峯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복재집(服齋集)』·『무인기문(戊寅紀聞)』·『덕양일기(德陽日記)』 등이 있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으로 1545년(인종 1) 신원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민(文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