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선우(善遇). 호는 삼계(三溪)·일휴당(日休堂). 전라남도 능주(陵州) 출신. 최충(崔冲)의 후손이며, 최혼(崔渾)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윤범(崔尹範)이고, 아버지는 최천부(崔天符)이다. 최경장(崔慶長)의 동생이다.
양응정(梁應鼎)·기대승(奇大升)에게 수학하였으며, 1561년(명종 16)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567년(선조 즉위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영해군수 등을 지냈는데 임진왜란 때는 상중(喪中)이라서 전라남도 화순에서 집을 지키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최경운(崔慶雲)·최경장(崔慶長)과 함께 고을사람들을 효유(曉諭)하여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 때는 고경명(高敬命)이 이미 전사한 뒤여서 그의 휘하였던 문홍헌(文弘獻) 등이 남은 병력을 수습하여 이에 합류함으로써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각 고을에 격문을 띄워 의병을 규합, 금산·무주에서 전주·남원으로 향하는 일본군을 장수에서 막아 싸웠고, 금산에서 퇴각하는 적을 추격하여 우지치(牛旨峙)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이 싸움은 진주승첩(제1차 진주전투)을 보다 쉽게 하였다. 이 공로로 경상우병사에 임명되었다.
1593년 6월 가토(加藤淸正) 등이 진주성을 다시 공격하여오자 창의사 김천일(金千鎰), 충청병사 황진(黃進), 복수의병장(復讐義兵將) 고종후(高從厚) 등과 함께 진주성을 사수하였으나 9일 만에 성이 함락되자, 남강에 투신자살하였다.
화순현읍지에 그의 「투강시(投江詩)」가 실려 있다. 진주의 창렬사(彰烈祠), 능주의 포충사(褒忠祠)에 제향되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의(忠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