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세가 되었을 때 백부로부터 깨우침을 받아 스스로 학문을 시작해 성현의 글을 섭렵하였다. 주희(朱熹)의 「백록동강규(白鹿洞講規)」를 읽고는 더욱 분발해 도봉산 망월암(望月庵)에 들어가서 수년을 독학해 깨달은 바가 컸다. 그 뒤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태인으로 돌아가 스스로 농사지으면서 어머니를 봉양하고 위기(爲己)의 학문에 전념하였다.
당시의 학자 백인걸(白仁傑)은 이항의 학문이 조식(曺植)에게 비길만하다고 칭찬하였다. 당시의 대학자인 기대승(奇大升)ㆍ 김인후(金麟厚)ㆍ 노수신(盧守愼) 등과 교유하면서 학문의 질을 높였다.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어 이기(理氣)를 논함에 있어 이와 기, 태극과 음양을 일체라고 주장해 이황(李滉)의 비평을 받기도 하였다.
1566년(명종 21) 명경행수(明經行修)하는 선비를 뽑을 때 첫 번째로 추천되어 사축승전(司畜承傳)에 임명되었다. 왕에게 진학(進學)과 치지(致知)하는 방법을 진언하여 칭찬을 받았다. 이후 의영고령(義盈庫令)을 지내고 임천군수가 되었는데, 부임할 때 왕이 귀마개를 하사해 노고를 위로하였다. 1567년 5월에 병으로 사퇴하고 돌아오니 왕이 의원을 보내어 문병을 하기도 하였다.
선조 초년에 의빈경력을 지내고 선공감부정ㆍ사옹원정을 역임하였다. 1574년(선조 7) 사헌부장령을 거쳐 장악원정을 지냈으나 병이 악화되어 사퇴하고 돌아왔다. 그 뒤 5도의 찰방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못했고, 왕이 네 차례나 의원을 보내 치료하게 했으나 결국 완쾌되지 못하였다.
이황(李滉)은 그를 높이 평가했으나 지나친 자신감을 비판하기도 했다. 또 홍직필(洪直弼)은 『매산집(梅山集)』에서 김인후, 기대승, 안방준, 박광일과 함께 그를 '호남의 다섯학자[湖南之五學]'로 높였다.
저서로는 『일재집(一齋集)』이 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태인의 남고서원(南皐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