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 ()

가족
의례·행사
시신이나 유골을 불로 태워 장사 지내는 방법.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화장(火葬)은 시신이나 유골을 불로 태워 장사를 지내는 방법이다. 힌두교의 장례 방법에서 유래하였으나, 한반도에는 불교와 함께 전파되었다. 불교의 영향력이 강했던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는 일부 왕이나 승려를 화장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와 조상 숭배 사상 때문에 국가가 화장을 엄하게 금지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국내에 들어온 일본인을 위해 화장이 다시 합법화되었고, 조선인들에게도 화장을 권장했으나 보편적 의례로 자리 잡지 못했다. 해방 후에도 화장률은 낮았으나 2000년대 들어 급증하였고, 2021년 현재 화장률은 90%를 넘어섰다.

목차
정의
시신이나 유골을 불로 태워 장사 지내는 방법.
연원 및 변천

화장(火葬)은 시신이나 유골을 태우는 장법(葬法)으로 다비(茶毘)라고도 칭한다. 인도 중부지방의 언어를 근원으로 삼는 팔리어(Pali language)에서는 '태운다'는 의미를 갖는다. 보통 화장이 불교와 연결되지만, 본디 화장은 인도의 힌두교들이 주로 시행했다. 그러던 것이 불교도들에게도 전파되었고, 불교를 통하여 한반도에도 전해진 것이다. 시신을 태우는 방식인 화장은 윤회 사상(輪回思想)과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는 불교의 생사관과 부합하여 종교적 의례이자 장법으로서 한반도에 정착했다.

기록으로 남아 있는 화장의 사례는 삼국시대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신라 문무왕(文武王)의 화장이다. 『삼국사기』 문무왕 21년(서기 681) 가을 7월 1일의 기사를 보면, 문무왕이 “내가 숨을 거두고 열흘이 지나면 곧 창고 문 앞 바깥의 뜰에서 불교의 의식에 따라 화장하라(屬纊之後十日 便於庫門外庭 依西國之式 以火燒葬).”라는 유언을 남겼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밖에도 『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신라의 효성왕(孝成王), 원성왕(元聖王), 진성여왕(眞聖女王), 효공왕(孝恭王), 신덕왕(神德王), 경명왕(景明王)이 화장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왕뿐만이 아니라 고승(高僧)들의 화장에 대한 기록도 있는데,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진덕여왕(眞德女王) 때 활동했던 자장법사(慈藏法師)가 다비를 행한 것이 그 예이다. 그러나 당시 사회 최고위층이 화장한 기록만이 남아 있고, 또한 다수라고 볼 수는 없다. 또 당대의 고승이었던 원효(元曉), 의상(義湘)등 대부분의 승려는 화장을 하지 않고 매장하거나 동굴에 시신을 안치하는 등 종교인의 화장도 보편적인 장법이었다고는 보기가 어렵다. 다만 화장이 금지되지 않고 상황에 따라 충분히 선택 가능한 장법이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 대한 기록과 유물을 통해서도 당대에 화장을 시행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남아 있는 353건의 고려 묘지명(墓誌銘) 중 화장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총 52명이며, 이 중 승려가 11명이다. 특히 인종(仁宗), 의종(毅宗), 명종(明宗) 때 화장 관련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하지만 여전히 고려시대에 화장이 보편적인 장법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남아 있는 기록과 유물의 수도 많지 않을 뿐 아니라, 불로 시신을 태우는 화장의 특성상 매장보다 비용과 시간이 훨씬 많이 들기 때문에 일반 백성이나 천민이 화장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화장과 매장이 공존하던 시기를 지나, 고려 말기에 주자학이 도입되면서 국가가 화장을 금지하기 시작하였다. 이미 공민왕(恭愍王) 14년(서기 1365)에 노국공주(魯國公主)가 난산으로 사망했을 때 왕은 화장을 원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하지 못했던 사례가 있었고, 공양왕(恭讓王) 때에는 헌사(憲司)에서 화장을 불인(不仁)한 ‘오랑캐의 장법’이라고 비판하며 위반한 자는 죄를 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조선은 유교 이념을 내세워 새롭게 건국됐기 때문에 불교식 장법으로 여겨졌던 화장은 초기부터 비판의 대상이었다.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에는 화장하면 수족을 끊는 형벌을 내린다는 조항이 있었다. 또한 화장한 사람만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화장을 권한 사람과 화장한 자를 제지하지 못한 관리나 이웃까지도 처벌 대상이었다. 1905년에 공포된 『형법대전(刑法大全)』에도 화장은 여전히 태(苔) 1백 대에 처하는 중범죄였다. 하지만 조선 중기에 해당하는 성종(成宗) 때까지도 화장하는 자가 있어 처벌해야 한다는 상소가 있었던 것을 보면, 장법이 완전히 매장으로 바뀌는 데에는 꽤 시간이 걸린 듯하다.

이처럼 조선시대에 화장을 엄격히 금지했던 것은 유교의 영향도 있으나, 토착 신앙과 풍수지리설의 영향을 받은 조상 숭배와도 관련이 있다. 고려시대까지의 풍수지리가 살아 있는 자들의 삶의 공간을 중시하는 양택(陽宅)을 중시했다면, 조선시대에는 죽은 자들의 공간, 즉 묘지와 같은 음택(陰宅)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음택을 중시하는 풍수지리와 조상 숭배 사상, 그리고 묏자리를 잘 써야 후손이 덕을 본다는 토속적 믿음이 더해져 묘지를 중시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그럼으로써 화장은 조선 내에서 금기시되었고, 매장이 보편적인 장법으로 자리 잡았다.

국가가 공식적으로 화장을 금지했던 조선과는 달리, 일제강점기에는 화장이 합법화되었다. 1912년 6월 조선총독부가 공포(公布)한 ‘묘지 · 화장장 · 매장 및 화장 취체규칙(墓地火葬場埋葬及火葬取締規則)’을 통하여 화장이 공식적인 장법으로 도입된 것이다. 이 ‘묘지규칙’으로 합법화된 화장은 한반도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을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일제강점기 초기에 화장하는 조선인은 여전히 극히 드물었다. 예를 들어, 1915년 경성부의 화장률은 4.6%에 불과했는데, 이조차도 전국적으로 보았을 때는 매우 높은 편에 속했다. 같은 시기 경상남도의 전체 화장수는 160건, 평안남도는 단 3건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1920년대 이후, 묘지를 토지의 낭비로 인식한 일제 당국은 점차 화장을 ‘문명화된 장법’으로 홍보하기 시작하는 한편, 묏자리를 중시하는 조선인의 믿음을 미신이라며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와 더불어 식민지 시기 진행된 도시화, 묘지 확보 및 유지에 드는 비용 등이 영향을 미쳐, 일제가 집계한 통계상으로 경성을 비롯한 대도시에서는 화장률이 눈에 띄게 증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시기의 화장률 증가를 조선인들의 장법 변화로 해석하기는 어렵다. 우선 일제가 집계한 화장률은 통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전염병 사망, 도시화, 묘지 이장 과정의 화장 등 여러 가지 외부 요인을 따로 구분하지 않았다. 또한 경제력이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선산(先山)이나 가족 묘지 등 묏자리를 중요하게 여겼다. 화장은 여전히 일본인의 장법으로 여겨지거나 객사, 요절 등 예외적인 죽음에 시행하는 장법이었다.

그런 까닭에 해방 후 화장률은 다시 급락했다. 1954년의 화장률은 3.6%에 머물렀다. 도시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도시 인구가 급증했던 시기인 1975년의 화장률이 14%였는데, 1984년까지 겨우 2.6% 증가했을 뿐이며 1991년까지도 17.8%에 그쳤다. 한국인들에게 화장은 여전히 일반적인 장법이 아니었던 것이다. 유교의 영향력이 강하게 작용하여, 성묘처럼 묘지를 유지하고 가꾸는 것이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뿐 아니라, 개신교 신자들은 육신의 부활이 교리에서 중요한 부분이었기 때문에 화장보다는 매장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 여전히 화장에 남아 있는 불교적 색채가 타 종교 신자들이 화장을 선택하지 않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계속 늘어나는 묘지가 국토를 잠식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장례 문화를 바꿔야 한다는 국가와 언론의 캠페인이 진행되면서 화장률이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했다. 또한 가족 구조의 변화와 명절이나 제사 등 가족 문화의 변화 등이 영향을 미쳐 스스로 미리 화장을 택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2005년부터는 화장률이 52.6%로 매장률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이후 화장률 증가는 더욱 빨라져서 2011년에는 71.1%, 2015년에는 80.8%를 기록하였으며, 2021년 4월에는 전국 화장률이 90.1%에 달하였다.

해방 직후에도 여전히 일반적인 장법이 아니었던 화장은, 이제 한국에서 보편적인 장법으로 자리 잡았다. 90%를 넘어선 화장률은 앞으로 계속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종교적인 이유로 화장률이 99%를 상회하는 일본에 비해, 한국은 현실적인 조건과 죽음 및 가족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 변화가 화장률의 변화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원전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대명률직해』
『형법대전』

단행본

문상련(정각), 『한국의 불교의례』(서울: 도서출판 운주사, 2001)
천선영, 『죽음을 살다』(나남, 2012)
국사편찬위원회 편, 『상장례, 삶과 죽음의 방정식』(두산동아, 2006)

논문

구미래, 「불교 전래에 따른 화장의 수용양상과 변화요인」(『실천민속학회』 4, 실천민속학회, 2002)
문상련(정각), 「고려 묘지명을 통해 본 불교 상장례」(『보조사상』 56, 보조사상연구원, 2002)
문상련(정각), 「고려 묘지명을 통해 본 고승 상장례」(『동아시아불교문화』 41,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 2020)
안양규, 「火葬에 대한 현대 한국 종교인의 태도」(『종교연구』 26, 한국종교학회, 2002)
이철영, 「火葬의 “孝”문화적 재인식」(『정토학연구』 22, 한국정토학회, 2014)
송현동, 「현대 한국 장례의 변화와 그 사회적 의미」(『종교연구』 32, 한국종교학회, 2003)
송현동, 「화장에 대한 종교계의 반응과 그 함의-기독교, 불교를 중심으로」(『종교문화연구』 5, 한신인문학연구소, 2003)
정길자, 「고려시대 화장에 대한 고찰」(『부산사학』 7, 부산사학회, 1983)
정일영, 「장법의 선택과 삶의 의미에 대한 탐색」(『죽음의 풍경을 그리다』, 한림대학교 생사학연구소 엮음, 모시는사람들, 2015)
정일영, 「화장, 동원된 '문명화'의 증거: 식민지기 화장률 증가의 해석」(『종교문화비평』 36, 종교문화비평학회, 2019)
관련 미디어 (2)
집필자
정일영(서강대학교 조교수)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