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관(尹瓘, ?1111)의 묘는 오랫동안 소재가 확인되지 않다가 1764년(영조 40)에 현 묘소 부근에서 묘비 조각이 발견되면서 윤관의 무덤으로 공인되었다. 수백 년간 윤관장군묘의 위치가 밝혀지지 않았던 탓에 조선 후기 현재의 묘역 일대에 청송심씨 묘가 들어서게 되고, 1662년(현종 3)에 지금의 윤관장군묘 바로 뒤에 인조 때 영의정 심지원(沈之源, 15931662)의 묘가 조성되었다.
100여 년 뒤 파평윤씨 일가가 이곳을 윤관장군의 묘로 주장하게 되면서 두 가문 간 산송(山訟)이 시작되었다. 영조가 윤관과 심지원의 묘를 모두 그대로 받들도록 중재하였으나 해결되지 않았고 현대까지 다툼이 이어졌다. 묘지를 둘러싼 오랜 갈등은 2005년 파평윤씨 문중에서 심지원묘를 비롯한 청송심씨 묘 19기를 이장할 부지를 제공하는 것으로 합의하고 2008년 이장이 완료되면서 해결되었다.
윤관장군묘는 처음부터 파주에 조성되었다는 기록도 있으나 아들 윤언이(尹彦頤, 1090~1149)의 묘지명에 의하면 임강현(臨江縣)에 있었다. 묘비 조각과 윤언이 묘지명의 내용을 바탕으로 윤관장군묘는 윤언이가 사망한 시기까지는 임진강 북쪽 임강현에 있었으나 윤관묘의 소재지를 파주로 기록한 『여지승람』이 편찬된 1481년 이전에 지금의 묘역으로 이장되었거나 새로 묘가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윤관장군묘는 파주 박달산(363m) 북서쪽 능선에서 북동-남서 방향으로 뻗어내린 지맥의 말단에 있다. 왕릉의 사초지(莎草地)와 같이 조성된 경사진 언덕의 정상에 봉분이 자리한다. 묘역은 2단의 계체석(階砌石)이 설치되어 3단으로 구분되며, 이 중 가장 상단에 봉분이 있다. 원형 봉분의 하단에는 다듬은 장대석으로 호석(護石)을 둘렀고 주위에는 ‘八’ 자 모양의 곡장(曲墻)이 둘러져 있다.
봉분 정면 왼쪽에는 1766년(영조 42)에 건립된 묘비가 세워져 있다. 2단 묘역에는 상석과 향로석, 망주석 2기가 있으며, 3단에는 가운데에 4각 장명등이, 양옆으로 문인석, 무인석 각 3기와 동자석과 석양 · 석마 각 2기가 설치되어 있다.
윤관 묘역의 석물은 묘비와 복두(幞頭)에 수직 홀(笏)을 들고 있는 고려시대 양식의 석인상을 제외하고 대부분 후대에 조성된 것이다. 묘역 아래에는 영정을 모신 여충사(麗忠祠)와 1861년(철종12) 건립한 교자총비(橋子塚碑), 1966년 세운 신도비 등이 있다.
윤관장군묘는 경기 파주시 광탄면 혜음로 930(분수리 산 4-1)에 있다. 1973년 7월 10일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1988년 2월 27일 사적으로 승격되었다. 묘역의 면적은 21,550㎡이며 파평윤씨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1990년대 묘역 정화 사업이 이루어져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2011년 7월 28일 ‘윤관장군묘’에서 ‘파주 윤관장군묘’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파주 윤관장군묘는 조성 시기가 분명치 않고, 후대에 정비가 이루어져 본래의 모습에서 변형되었으나, 여진 정벌의 주역으로 고려시대 북방 영토를 수호하고 개척했던 윤관의 업적을 살펴볼 수 있는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