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4년(예종 9) 3월 과거에 급제하고 후 금오위녹사, 첨사부사직(詹事府司織), 예부낭중, 기거사인(起居舍人) 등을 역임하였다. 1128년 8월 예부시랑으로 송에 가서 송의 길을 빌려달라는 요구를 들어주지 못함을 알리는 표문(表文)을 바치고 12월 돌아왔다. 이듬해 5월 기거랑(起居郎)으로서 좌사간(左司諫) 정지상(鄭知常) · 우정언(右正言) 권적(權適) 등과 정치의 득실을 논해 왕으로 하여금 실시하도록 하였다.
1132년 4월 기린각(麒麟閣)에서 국자사업(國子司業)으로 정항(鄭沆) · 정지상 등과 경연(經筵)에 나아가 경의(經義)를 강론하고 상으로 화서대(華犀帶)를 받았다.
1133년 5월 왕이 김부식(金富軾)에게 『주역(周易)』을 강론하고, 김부식에게 이를 묻고 논란하게 하였다. 『주역』에 매우 정통했던 윤언이는 정연한 논리로 반박해 김부식의 대답을 궁하게 하였다. 김부식과는 이전부터 감정이 있었다. 예종 때 아버지 윤관이 왕명으로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의 비문을 지은 일이 있었다. 그런데 문도(門徒)들이 보기에 글이 좋지 않았는지, 왕에게 말해 김부식을 시켜 다시 짓게 하였다. 김부식은 사양하지 않고 다시 지었고, 그 때문에 원한을 품고 있었다.
1135년 서경에서 묘청(妙淸)의 반란이 일어나자, 원수(元帥) 김부식의 막료로 출정해 서경을 함락시키는 데 많은 공을 세웠다. 그러나 정지상과 내통했다는 김부식의 보고로 양주방어사(梁州防禦使)로 좌천되었다가 뒤에 광주목사(廣州牧使)가 되었다. 이 때 왕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것과 지난날의 자신을 해명하는 글을 올렸다.
이후 보문각직학사(寶文閣直學士), 어사대부 동지추밀원사(御史大夫 同知樞密院事), 수사공 좌복야 판예부사(守司空左僕射判禮部事), 참지정사 판서경유수사(參知政事判西京留守事) 등을 역임한 후 1148년(의종 2) 12월 정당문학(政堂文學) · 판형부사(判刑部事)가 되었으며, 이듬해 9월 세상을 떠났다.
예종 · 인종 양조에 걸쳐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고, 특히 『주역』에 밝았다. 말년에 불교를 매우 좋아했고, 은퇴해서는 파평(坡平)에서 살았으며, 중 관승(貫乘)과 친교가 있었다. 아들 3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해 그 처에게는 나라에서 상을 내려 매년 녹(祿)을 주었다. 저서로는 『역해(易解)』가 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