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산리 장고봉고분은 1986년 2월 7일에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이 고분이 처음 알려진 것은 일본 고유의 무덤이라는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 한반도에도 존재하는지 논쟁이 뜨거웠던 1984년 말이며 1985년 말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강인구 교수에 의한 봉토측량조사가 있었다. 한반도에서 장고형고분은 주로 전라남도 지역에 분포하며 방산리 장고봉고분이 최대 규모이다. 이 고분의 봉토 원형부 중심에 널길〔羨道〕이 달린 장방형 돌방〔石室〕이 있는데 이미 도굴되었다. 장고봉고분을 포함한 고분군은 총 15기로 이뤄져 있고 면적은 2,850㎡이다.
고분의 도굴여부와 정비를 위한 시굴조사가 2000년에 있었다. 고분은 방형부가 북쪽이며 원형부가 남쪽인데 해발고도상으로 방형부가 2m 정도 높다. 정밀측량 결과 봉토 자락으로부터의 크기는 전체 길이 76m, 원형부의 지름 43m, 높이 10m이고, 방형부는 너비 37m, 높이 9m이며, 연결부는 너비 30m, 높이 6m이다. 돌방은 봉토의 길이와 직교하게 동서방향으로 축조하였는데 지상식이다. 긴 널길 부분을 서쪽에 둔 장방형의 굴식〔橫穴式〕이다.
널방〔玄室〕은 길이 460㎝, 동벽 너비 240㎝, 높이 190㎝, 서벽 너비 210㎝, 높이 180㎝로 현문(玄門)이 있는 서쪽을 약간 좁혀 만들었다. 현문부의 크기는 길이 70㎝, 너비 58㎝, 높이 115㎝이다. 널길 부분은 길이 400㎝, 너비 120㎝인데 3매의 천장돌〔天障石〕을 비스듬히 덮었다. 널방은 단벽은 수직으로, 장벽은 내경하며 쌓아올렸고 하단과 천장돌 바로 아래는 판석을 나머지는 깬돌〔割石〕을 11∼12단으로 쌓았다. 천장돌은 5매의 판석으로 덮었으며 바닥석은 대270×180㎝의 판석 1매와 작은 판석을 깔았다. 널방 벽에는 주칠 흔적이 남아 있다.
장고봉고분은 외형과 널방 구조에서 일본의 전방후원분과 관계가 있는 고분이다. 이런 점에서 피장자와 축조집단의 성격을 두고 학계의 해석이 제 각각이다. 이 고분을 포함한 전방후원분 형태의 고분들은 영암 태간리 자라봉 고분, 함평 예덕리 신덕 고분군을 비롯한 전라남도 해안지방 및 내륙을 중심으로 한 서 · 남해안에서 10여 곳이 알려져 있다. 이 고분의 조영시기는 4∼5세기대로 추정되며, 영산강 유역의 재지세력이 백제와 왜의 교섭 속에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