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분군이 소재한 서악동 750번지 일대 2,948평이 1964년 8월 29일 사적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흔히 ‘경주 서악동 고분군’이라고 한다. 경주시의 서교 서악동 선도산의 서남 자락에 있다. 고분군이 있는 지형은 선도산의 서남지맥의 능선이다.
신라에서 마립간기(麻立干期)가 끝나고 왕호를 왕으로 지칭하는 법흥왕(法興王, 재위 514∼539년)대가 되면 왕릉은 경주의 평지에서 벗어나 경주분지의 좌우에 펼쳐진 산지의 말단부 구릉으로 이동한다. 이 때 묘제도 변하여 앞 시기의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에서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바뀌게 된다. 이것을 잘 알려주는 것이 서악리고분군이다.
서악리고분군은 경주시 서악동의 무열왕릉을 중심으로 하는 능원(陵園)내의 산중턱과 인접한 북편의 선도산 산록에 분포하는 고분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전진흥왕릉(傳眞興王陵), 전진지왕릉(傳眞智王陵), 전문성왕릉(傳文聖王陵), 전헌안왕릉(傳憲安王陵)과 전법흥왕릉(傳法興王陵), 태종무열왕릉(太宗武烈王陵) 등의 왕릉 6기가 소재하고 있다. 또 이 고분들의 북서에 있는 선도산성 안 곳곳에서도 고분들이 조사되었고, 동편의 왕릉들을 감싸고 길게 뻗는 능선들과 남편의 대구-경주간 국도가 통과하는 소태고개의 좌우 능선들에도 많은 고분들이 분포하고 있다. 특히 소태고개의 동편에 남북으로 길게 뻗은 능선을 ‘장산’이라고 부르는데, 이곳의 남쪽 하단부에는 장산 토우총(獐山 土偶塚)이 위치해 있다.
서악동에 위치한 왕릉으로 전해지는 것 가운데 확실한 것은 제29대 태종무열왕릉 뿐이고, 나머지 5기의 능들은 북쪽의 선도산 동남자락에 있는 고분들 가운데 조선 영조 6년인 경술년(1730년) 이후 전칭되어 오던 것을 1960년 이후 정부에서 사적으로 지정하여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무열왕릉을 제외하면 서악리에 분포하는 고분들 가운데 최대형분들인 무열왕릉의 뒤편에 남아 있는 것들을 무시하고 그 위에 분포하는 비교적 규모가 작은 것들을 지칭한 것이다. 이 고분군 가운데 규모가 크고 왕릉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앞에 설명한 무열왕릉 뒤에 능선의 상부를 따라 분포하는 무열왕릉을 포함한 5기의 대형고분들일 것이다. 이 고분들은 선도산에서 동향한 능선의 정상부를 따라 위에서부터 1·2·3·4호분, 무열왕릉 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이 고분들은 모두 남향의 돌방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1호분은 높이 8m, 직경 39m의 원형봉토분으로 봉토자락의 1.7m 높이에 자연석으로 쌓은 축대가 돌려져 있다. 2호분은 높이 8m, 직경 40m의 원형봉토분으로 봉토자락 3m 높이에서 경사지게 세워진 자연석이 드문드문 관찰된다. 3호분은 높이 12m, 직경 60m의 원형봉토분으로 봉토자락 1.5m 높이에서 경사지게 세워진 자연석이 보이고 있다. 4호분은 높이 10m, 직경 50.9m의 원형봉토분으로 봉토자락 2m 높이에서 경사지게 세워진 자연석이 드문드문 관찰된다.
이러한 사실은 돌방무덤이 채용되면서 신라의 왕릉이 산록으로 이동한 것이 인정되는 점, 돌방무덤을 채용하면서 왕릉의 규모가 보다 축소되었으나 경주를 비롯한 주변지역에 남아 있는 대형분들 가운데 이 고분들이 최대형분에 해당한다는 점 등으로 보아 앞에 열거한 현재 왕릉으로 전해지는 것들보다는 이것들이 왕릉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알려준다. 따라서 일부에서는 이 고분들이 입지적으로 무열왕릉 직후방에 상하 일렬을 이루고 있는 점, 풍수지리에 합당한 지형을 갖추고 있는 점, 봉토의 규모가 전신라시대 능들 가운데에서도 최대형에 속하고 있는 점 등을 들어 단순한 왕족의 묘가 아니라 무열왕의 직계조상 왕들의 묘로 비정하여 1호분은 법흥왕릉, 2호분은 진흥왕릉, 3호분은 진지왕릉, 4호분은 무열왕의 아버지인 용춘(龍春), 즉 문흥대왕릉(文興大王陵)으로 비정하였다. 한편 조선 순조 때의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는 그의 추사집에서 『진흥왕릉고(眞興王陵攷)』라는 글을 통해서 이들을 법흥왕릉, 진흥왕릉, 문성왕릉, 헌안왕릉 등으로 추정하였다.
고분들이 일렬을 이루며 능선의 상위에서 하위로 조영되었을 가능성, 일렬을 이룬다는 것은 직계의 가계를 의미하고 있을 가능성 등을 고려하면 학계 일부의 이러한 비정이 타당하나 아직 증거는 불충분한 상태라 하겠다. 한편 무열왕릉의 앞에는 무열왕의 직계 자손인 김인문(金仁問)의 묘와 김양(金陽)의 묘가 자리잡고 있고, 신라의 왕릉들에 나타나는 둘레돌[護石]의 변천과정이 돌무지덧널무덤의 돌담식 다음에는 자연석 또는 깬돌(割石)을 쌓고 버팀돌을 두는 것임을 선덕여왕릉(善德女王陵)으로 보아 알 수 있는데, 앞에서 본 이 고분들이 이러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