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널무덤

선사문화
개념
청동기시대 지하에 묘광을 파고 판돌이나 깬돌로 장방형의 돌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1매 이상의 뚜껑돌을 덮는 무덤 양식.
이칭
이칭
석관묘(石棺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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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돌널무덤은 고인돌, 석개토광묘, 독무덤과 함께 우리나라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무덤 양식이다. 일반적인 형태는 지하에 묘광을 파고 판돌이나 깬돌로 장방형의 돌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1매 이상의 뚜껑돌을 덮는다. 우리나라에서는 고조선의 옛 터전인 중국 동북부 지방과 북한 지역은 물론이고 남한 지역에서도 활발하게 발견되며, 금강 중하류 일대에서 밀집 분포를 보이고 있다.

정의
청동기시대 지하에 묘광을 파고 판돌이나 깬돌로 장방형의 돌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1매 이상의 뚜껑돌을 덮는 무덤 양식.
개요

돌널무덤(石棺墓)고인돌, 석개토광묘, 독무덤과 함께 우리나라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무덤 양식으로 시베리아, 중국 동북부 지방, 한반도, 일본 등 폭넓은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돌널무덤의 일반적인 형태는 지하에 묘광을 파고 판돌이나 깬돌로 장방형의 돌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1매 이상의 뚜껑돌을 덮는다.

돌널무덤은 석재의 재료와 형태, 축조 방법에 따라 두 종류로 세분하기도 하는데, 시기적으로 가장 빠르고 전형적인 것은 네 벽과 바닥, 그리고 뚜껑돌을 각각 1∼2매의 잘 다듬어진 판돌을 사용하여 상자 모양으로 만든 돌상자[石箱] 형태이다. 다음으로 깬돌 여러 매를 사용하여 네 벽을 만들고, 그 위에 뚜껑돌을 덮은 형태의 형식이 존재한다.

형태와 특징

돌널무덤은 묘광의 축조 방식과 깊이에 따라 일단과 이단 돌널무덤으로 나누기도 하며, 돌널의 조립 방법에 따라 ‘ㅍ’, ‘II’, ‘ㅁ’자형 등으로 구분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ㅍ’자형으로 조립된다.

바닥은 생토면을 그대로 사용하거나 바닥에 돌을 깐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금강 유역권에서는 송국리형 토기를 바닥 전면에 까는 경우도 있다. 또한 바닥에 요갱(凹坑) 시설이 발견되기도 하는데, 이러한 내부 시설도 대부분 금강 유역권에서 발견된다.

고인돌과 마찬가지로 돌널무덤의 규모도 매우 다양하게 발견되는데, 이것은 대체로 성인이나 유아용의 무덤이거나 매장법의 차이, 즉 펴묻기[伸展葬]와 굽혀묻기[屈葬]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시공간적 변천 과정

돌널무덤은 지역과 시기에 따라 다양한 구조를 보이며, 함께 발견되는 묘제와 출토 유물도 지역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중국의 동북부 지역에서는 중원 지역과 달리 돌널무덤을 축조하는 전통이 강하며, 요서의 하가점상층문화(夏家店上層文化)부터 길림(吉林) 지역의 서단산(西團山)문화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발견된다. 이들 지역에서 독립적으로 발견되기도 하지만 마성자문화(馬城子文化)의 동굴 복합묘와 요동반도 남단의 적석 복합묘에서는 토광묘와 함께 발견되기도 한다.

또한 요령 일대의 돌널무덤은 한반도처럼 단독으로 축조된 경우가 거의 없고 대부분 군집을 이루어 발견된다. 예를 들어 강상(崗上)과 루상(樓上) 유적에서는 장방형의 적석묘역 내에서 다양한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중심에서 발견되는 것은 판돌로 축조한 전형적인 돌널무덤이다.

또한 앙신장(仰身葬)과 함께 화장(火葬)이나 이차장의 장법이 활발하게 이루어진다는 점에서도 다른 지역과 차이를 보인다. 무덤 내부에서는 비파형동검을 포함한 다양한 청동기와 함께 미송리형토기, 파수부장경호 등이 발견된다.

두만강 지류의 연길 소영자(小營子) 유적에서는 100여 기에 이르는 돌널무덤이 발견되었다. 이 유적에서는 서단산문화의 돌널무덤과 다른 구조도 발견되었는데, 예를 들어 2~3기의 돌널이 장 · 단벽이나 뚜껑돌을 공유하는 독특한 형태를 보이기도 한다. 또한 단인장을 기본으로 하지만 하나의 돌널 안에 2∼4인의 시신을 안치하는 다인장의 장습도 보인다는 점에서 다른 지역과 차이를 보인다.

장법으로는 앙신장이 기본이나 일부에서는 굴장(屈葬)과 화장도 이루어졌다. 부장품으로는 각종 석기와 장식품, 유정동 유형의 토기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이들 돌널무덤들이 대부분 청동기시대의 이른 시기부터 축조되었다는 점을 나타낸다.

돌널무덤은 북한 지역에서도 청동기시대 이른 시기부터 출현하는데, 현재까지 발견된 것을 보면 다른 지역과 달리 네 벽 모두 각 한 1매의 판석을 이용한 돌상자 모양이 대부분이다.

바닥시설은 판석 1매를 사용하지만 판석의 위나 아래에 자갈돌을 한 겹 깐다는 점에서 다른 지역과 차이를 보인다. 북한 지역 돌널무덤의 대표적 예로는 먼저, 압록강 유역 강계 풍룡리 유적을 들 수 있는데, 이 유적에서는 피장자의 머리쪽이 넓고 발쪽이 좁아지는 두광족협식(頭廣足狹式)의 돌널무덤이 발견되었고, 돌널 내부에서 청동단추[銅泡]와 검은긴목항아리[黑陶長頸壺]가 발견되었다.

또한 강계시의 공귀리 유적에서는 수매의 판돌을 사용하여 규모가 큰 중심 돌널 옆에 작은 돌널을 잇대어 축조한 형식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부모와 자식이 합장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황해도 배천 대아리의 돌널무덤은 각 벽을 1매의 판돌로 짠 형식인데, 돌널 내부에서 후기형의 비파형동검과 청동화살촉, 대롱옥, 돌화살촉이 발견되었다. 마지막으로 황해도 천곡리(泉谷里)의 돌널무덤에서는 청동기시대 늦은 단계의 표지 유물인 세형동검(細形銅劍)이 발견되었다.

남한 지역에서는 청동기시대 전기 후반(서기전 10세기경)부터 돌널무덤이 축조되는데, 그 수는 많지 않지만 강원도와 서부 경남 지역에서 집중되어 발견된다. 무덤방에서는 이단병식석검과 삼각만입촉, 대부소호가 발견된다.

청동기시대 중기(서기전 9세기경)에 이르면 돌널무덤은 분포와 밀도에서 폭발적인 성장을 하게 된다. 남부 지방 전역에서 발견되는 경향이 있지만 가장 밀집되어 발견되는 지역은 금강의 중하류 일대이다.

대부분 낮은 구릉의 정상부나 사면부에서 발견되는 금강 중하류의 석관묘는 1기 혹은 소수가 발견되기도 하지만, 최근에는 서천 오석리, 공주 분강리와 산의리, 부여 송국리, 논산 마전리 유적처럼 몇십 기가 한 지점에서 군집으로 발견되고 있다.

군집 형태의 석관묘는 분묘 간에 중복을 거의 보이지 않으면서 대부분의 유적에서 3기 내외의 무덤이 소군집을 이루어 분포하는 특징을 보인다. 또한 금강 중하류에서는 돌널무덤이 대부분 석개토광묘, 독널무덤과 함께 발견되고, 이들 묘제가 송국리형 주거지와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기 때문에 ‘송국리형 묘제’로 주장되기도 한다.

부장품으로는 대부분 무문토기편, 돌검, 돌화살촉, 붉은간토기, 옥 등이 발견되지만, 부여 송국리 유적 석관묘에서는 비파형동검이 함께 부장되어 피장자의 지위가 상당히 높았음을 시사하고 있다.

금강 중하류에서는 돌널무덤이 석개토광묘, 독널무덤과 동반되어 발견되지만 고인돌과 함께 발견되는 경우가 많지는 않다. 그러나 서해안 일대와 금강 상류 지역, 전라남도, 경상도 일대에서는 고인돌이 밀집 분포하는데, 이들 지역에서 돌널무덤은 고인돌과 혼재되어 발견되지만 금강 중하류에 비해 발견 빈도와 밀도가 현저하게 떨어진다. 진주 귀곡동 유적에서는 고인돌을 중심으로 돌널무덤이 주위에 분포하는 특징을 보인다.

청동기시대 후기(서기전 5세기경)에 접어들면 북방 지역의 점토대토기 문화가 유입되면서 남한 지역의 돌널무덤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 가장 늦은 예로 고성 솔섬의 돌널무덤을 들 수 있는데, 각 1매의 판돌로 네 벽을 짜 맞춘 전형적인 돌널무덤의 형태를 보인다. 부장품으로는 삼한시대(三韓時代)에 속하는 회색 연질의 주머니호가 출토되었다.

참고문헌

단행본

『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시대편』(국립문화재연구소, 2004)
『한국고고학사전』(국립문화재연구소, 2001)

논문

김승옥, 「묘제의 특징과 변천」(『한국청동기문화개론』, 진인진, 2015)
김승옥, 「금강유역 송국리형 묘제의 연구: 석관묘·석개토광묘·옹관묘를 중심으로」(『한국고고학보』 45, 한국고고학회, 2001)
이종선, 「한국 석관묘의 연구」(『한국고고학보』 1,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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