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부부총은 경상남도 양산시 북정동에 있는 사적인 양산북정리고분군 가운데 제10호분이다. 성황산에서 서쪽으로 뻗어 나온 구릉의 등줄기를 따라 연주상(連珠狀)으로 축조된 대형 무덤 중 가장 아래쪽에 자리한 원형 무덤이다. 1920년 일본인 오가와〔小川敬吉〕 등에 의해 발굴되었으며, 1990년 동아대학교박물관에 의해 다시 발굴 조사되었다.
묘제는 수혈계(竪穴系) 앞트기식돌방무덤으로 추정된다. 긴 축 방향은 동서로 한 장방형의 무덤구덩이를 조성하여 매장 주체부를 만들고 그 위에 봉분을 조성하였다. 봉분의 규모는 바닥 부분 직경이 23m, 3m로서 원형 무덤이다. 봉분의 가장자리에는 깬돌을 높이 110㎝로 쌓은 둘레돌을 설치하였고, 둘레돌 바깥에는 너비 5m 정도의 도랑을 마련하였다. 매장 주체 시설은 길이 5.49m, 너비 2.7m, 높이 2.58m이다.
돌방은 서쪽 짧은 벽에 입구를 만든 앞트기식이다. 네 벽은 정연하게 같은 깬돌을 편평하게 쌓아 올렸고 출입구가 마련된 서쪽 짧은 벽은 수직으로 쌓았다. 큰 돌 7매를 가로로 걸쳐 돌방의 뚜껑으로 하였다.
돌방 바닥에는 동쪽으로 치우쳐 길이 2.8m, 너비 0.8m, 높이 0.8m의 시상(屍牀)을 2차에 걸쳐 만들었다. 즉, 부부총의 시상대는 먼저 시상대를 설치한 다음, 남편을 안치하고 남편의 왼쪽으로 유물을 부장하였다. 이후 시상을 개조한 뒤 다시 추가장으로 부인을 안치하고 그곳에 있는 유물은 동쪽 부장 칸으로 이동시킨 것으로 추정된다.
유물은 안쪽 벽인 동벽에 붙여서 넓이 약 70㎝ 정도의 껴묻거리 구역을 설치해 토기류 · 마구류 · 무기류를 부장하였다. 그리고 중앙의 주인공 안치 공간에는 금속제의 금동관과 금동신발 등의 착장 유물이 부장되었으며, 주인공 발치 아래인 서쪽과 입구 짧은 벽 사이의 공간에는 머리가 남쪽으로 향한 3구의 순장자가 안치되었다. 순장자 공간에는 비취제 곱구슬과 금동가는고리귀걸이, 손칼 등이 부장되었다.
양산부부총에서 출토된 유물은 관대(棺臺)의 남반부에서 금속 제품이 다수 출토되었으며, 동쪽에서부터 금동제출자형관식 · 금제귀걸이 · 유리제목걸이 · 은제허리띠 · 은제반지 · 금동제신발의 순으로 놓여 있었다. 시신의 왼쪽과 오른쪽에는 차는 칼로서 세고리자루큰칼과 칼 고리가 사각형인 방두대도가 놓여 있었다. 북반부에는 동쪽에서부터 은제관전립식, 금제귀걸이, 곱구슬과 대롱옥을 은줄로 연결한 목걸이, 은제팔찌, 은제허리띠의 순으로 놓여 있었다. 주위에서는 철제가위가 1점 출토되었다.
유물의 출토 상황으로 보아 남쪽의 피장자는 남성, 북쪽은 여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여성 피장자 관대의 30㎝ 정도 하부에서 자갈돌층이 확인되었으며, 여기에서 발걸이 1점과 금동제운주 3점이 출토되었다. 이 등자와 짝을 이루는 다른 1점이 껴묻거리 구역에서 출토된 점에서 남성 피장자가 먼저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 이 관대는 북반부 쪽이 남반부 쪽보다 1단 낮은 1인용으로 축조되어 북반부 일대에도 남반부 피장자의 껴묻거리를 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관대에서 서벽까지의 공간에는 머리를 남쪽으로 둔 3구의 사람 뼈가 검출되었다. 동쪽 사람 뼈에는 쇠손칼, 가운데 사람 뼈에서는 금동제귀걸이 · 목걸이 · 사행상철기(蛇行狀鐵器: 깃발꽂이), 서쪽 사람 뼈에서는 유리제목걸이가 출토되었다. 이들의 껴묻거리는 아주 빈약한 편이어서 관대 위에 있는 피장자들은 주인공의 하위 신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입구인 서벽은 정연하게 3단 정도 쌓은 뒤, 그 위는 무질서하게 쌓여 있는데 주위에 대한 조사가 불충분해 널길의 존재 여부는 불명확하다.
토기류에는 표면 색상, 정면 방식, 문양 등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는 2그룹의 토기가 남쪽과 북쪽 공간에서 각각 출토되고 있으며, 한 그룹은 양산 지역의 전통적인 토기의 특징을 보여 주는 재지계 토기군이며, 또 다른 그룹은 경주 지역의 특징을 보여 주고 있어 경주 지역 생산품으로 추정된다. 주로 굽다리접시류가 주를 이루며 그 외 긴목항아리 · 그릇받침 · 뚜껑 등이 포함되어 있다.
마구류에는 안장 · 재갈 · 등자 · 마탁 · 행엽 · 운주 · 사행상철기가 출토되었으며, 무기류로는 대도 · 창 · 도자 · 활 · 화살촉 · 화살통이 출토되었으며, 장신구로는 출자형관식 · 귀걸이 · 목걸이 · 허리띠 · 반지 · 신발이 출토되었는데, 대부분 경주 지역과 유사성을 가지나, 경주 지역에 비해 재질이 한 등급 정도 낮은 것으로 보인다.
한편, 양산부부총의 매장 방법에 대해서는 다수의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첫째, 1차 남성 주인공 매장 시 순장이 먼저 이루어지고 2차 여성 주인공의 추가장이 이루어졌다는 견해, 둘째, 1차 남성 주인공 매장이 먼저 이루어지고 2차 여성 주인공 추가장 시 순장이 이루어졌다는 견해, 셋째, 부부가 아닌 남성 주인공과 함께 동시에 매장된 4명의 순장자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 이러한 견해는 신라 지증왕이 시행한 순장제 금지(503년)와 연관지어 해석하고 있으며, 이러한 해석을 통해 양산부부총의 축조 시기를 5세기 후반~6세기 전반으로 추정하고 있다.
양산부부총은 56세기에 조영된 사적인 양산북정리고분군의 위상을 보여 주며, 당시 신라의 중앙과 지방 정책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고분이다. 고분의 구조는 5세기 후반6세기 전반 대에 조성되었고, 신라 지역의 앞트기식돌방무덤 중 대형급에 해당하며, 특히 신라 중앙을 벗어난 지방의 고분 구조와 순장 연구에 있어 주목되는 고분이다.
출토 유물 중 금속제 유물의 대부분이 신라 중앙인 경주에서 제작 · 유통된 것으로서, 금동관, 관모 등의 착장 유물과 금동마구류 등을 통해 볼 때 경주 지역과 매우 비슷하나 경주 지역보다는 재질이 한 등급 정도 낮다. 이러한 신라 지배층에서 보이는 유물의 조합을 통해 볼 때 양산 지역은 신라의 지방 정책 실시 과정에서 중요한 지리적 요충지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토기류에 있어서는 양산 지역 재지계의 토기와 경주계의 토기가 혼합되어 출토되는 점으로 보아, 고분의 주인공은 지역 고유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으면서 신라 중앙의 간섭과 통제를 받는 지방 호족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