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천왕과 왕후 연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고약로(高藥盧) 혹은 고약우(高若友)이다. 255년(중천왕 8)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성품이 총명하고 인자하여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재위 기간은 270∼292년이다.
일명 ‘서양왕(西壤王)’이라고도 한다. 왕으로 즉위한 이후 271년 서부대사자(西部大使者) 우수(于漱)의 딸을 왕후로 삼았다. 이때 보이는 서부라는 표현은 고구려에서 나부(那部)가 해체되며 방위부로 전환되던 양상을 보여준다. 고국천왕 비의 아버지인 우소(于素)와 서천왕 비의 아버지 우수는 같은 부(部) 출신으로 보이지만, 그들의 출신 부가 연나부(椽那部)와 서부(西部)로 각각 다르게 나오기 때문이다.
271년 국상 음우(陰友)가 죽자 음우의 아들 상루(尙婁)를 국상으로 삼았다. 276년과 288년에는 신성(新城)에 행차하였는데, 이는 압록강 중상류 일대를 제외하면 가장 일찍 나오는 성곽 관련 기사이다. 특히, 같은 기사 내에 해곡태수 등 지방관까지 확인되고 있어 당시 지방제도를 정비하던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280년에 숙신(肅愼)이 침입하자 동생인 달가(達賈)로 하여금 반격을 하게 하였다. 달가는 단로성(檀盧城)을 빼앗은 후 나아가 600여 호를 부여 남쪽의 오천(烏川)으로 집단 이주시켰다. 이에 대한 전공으로 달가를 안국군(安國君)에 봉하며 군사 관계 일을 관장하게 하였고, 양맥(梁貊) 및 숙신의 여러 부락을 통솔하도록 하였다. 286년 왕의 동생인 일우(逸友)와 소발(素勃)이 반역을 꾀하자 이를 처단하였다.
292년에 죽었으며, ‘서천지원(西川之原)’에 장사하였다. 서천왕릉은 296년(봉상왕 5)에 모용씨(慕容氏)의 군대가 고구려를 침입하였을 때 파헤쳐질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당시 도굴 작업을 하던 자들이 갑자기 죽고, 무덤 안에서 음악 소리가 울려 나왔다는데, 이를 두려워한 모용씨의 군사들이 고구려에서 철수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삼국사기』 봉상왕 본기에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