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위 292∼300. 치갈왕(雉葛王)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상부(相夫) 또는 삽시루(臿矢婁). 서천왕의 아들로 부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어려서부터 교만하고 의심이 많았다.
왕위에 오르자 곧 왕권 강화에 주력, 숙신(肅愼)을 격파해 국민의 존경을 받고 있던 숙부 달가(達賈)를 죽이고, 293년(봉상왕 2)에는 동생 돌고(咄固)를 죽였으며, 피신해 있던 돌고의 아들 을불(乙弗 : 뒤의 美川王)까지 집요하게 추적하는 등 자신의 안전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세력들을 제거하였다.
또한 왕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계속된 흉년에도 불구하고 298년과 300년에 궁실을 대규모로 증축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다링강(大凌河) 하류 방면에서 일어나 세력을 확장해 가던 선비(鮮卑) 모용부(慕容部)의 모용외(慕容廆)와 충돌하였다.
293년과 296년 모용외군의 침략을 받았는데, 293년에는 신성재(新城宰)인 북부(北部) 소형(小兄) 고노자(高奴子)의 활약으로 이들을 격퇴했고, 296년에는 침략군이 고국원(故國原)에 이르러 서천왕릉을 도굴하려다가 무덤 속에서 음악 소리가 들리자 놀라서 스스로 물러갔다.
그런데 이 같은 사실들은 당시 모용외의 세력이 아직 랴오허강(遼河)을 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사실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견해도 있다.
300년에 가뭄으로 백성들이 굶주리는 가운데 왕이 궁실을 수리하려고 백성을 징발하려 하자, 국상(國相) 창조리(倉助利)가 부당함을 간했으나 왕은 듣지 않고 오히려 창조리를 죽이려 하였다.
이에 창조리는 다른 신하들과 왕을 폐위할 것을 모의하였다. 왕은 사태가 돌이킬 수 없게 되었음을 알고 두 아들과 함께 자살한 뒤 봉산원(烽山原)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