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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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준길 지석
송준길 지석
가족
개념
죽은 사람의 인적사항이나 무덤의 소재를 기록하여 묻은 도판이나 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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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죽은 사람의 인적사항이나 무덤의 소재를 기록하여 묻은 도판이나 판석.
내용

대체로 본관과 이름, 조상의 계보, 생일과 죽은 날, 평생의 행적, 가족관계, 무덤의 소재와 방향 등이 기록되며 무덤 앞이나 옆에 묻혀 있다.

일반적으로 흔히 묘지(墓誌)라고도 일컫는데, 이것은 지석에 실린 독특한 문체의 글을 가리키는 것으로, 지석과는 엄격히 구분된다. 지석에 실리는 글은 크게 묘지와 묘명으로 구분된다.

묘지는 오로지 전기(傳記)와 같이 사실만을 적은 산문을 말하며, 묘명이란 적혀진 사실에 대해 논의를 덧붙여 시로 읊은 운문을 말한다. 따라서 지석에 실린 글 가운데 이 두 가지의 내용이 함께 있을 때에는 묘지명이라고 부르며, 또 그 앞에 서문이 있을 때에는 묘지명병서(墓誌銘竝序)라고 부른다.

그 밖에 다른 곳에서 사망하여 고향으로 운반할 때의 기록은 귀부지(歸祔誌), 다른 곳에 매장하였다가 이장하였을 때의 기록은 천부지(遷祔誌), 뚜껑돌에 새긴 글은 개석문(蓋石文), 벽돌에 새긴 글은 묘전기(墓磚記), 나무판에 쓴 글은 분판문(墳版文)·묘판문(墓版文) 등으로 구분하며, 그 밖에도 장지(葬誌)·지문(誌文)·광지(壙誌)·분기(墳記)·광명(壙銘)·곽명(槨銘)·매명(埋銘) 등으로도 불린다.

예서에 따르면, 지석은 관을 묻기 전에 두 개의 옥돌을 네모나게 갈아 하나는 뚜껑[誌蓋石]으로, 또 하나는 바탕[誌底石]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번자(燔瓷) 또는 편회(片灰)로 대신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관을 광중(壙中)에 묻어 회로 다진 다음에, 평지일 경우에는 남쪽 가까운 곳에 벽돌로 쌓은 작은 광 안에, 산간일 경우에는 광중의 남쪽 몇 자 떨어진 곳에 4, 5자 파고 벽돌 광 안에 넣는다.

만일에 번지(燔誌)를 쓸 때에는 석함(石函)이나 번자합(燔瓷盒)에 넣거나 석회·황토·고운 모래를 섞어 덮은 목궤(木櫃) 안에 둔다. 또한 ≪세종실록≫에 따르면, 왕의 지석은 현실(玄室)에서 남쪽으로 일곱 자 떨어진 곳에 다섯 자 길이의 땅을 파고 석회·황토·고운 모래를 섞어서 광을 만들고 넣는다.

지석은 안쪽 4면을 유회(油灰)로 발라서 물이 들지 않도록 하여 개지석을 닫은 뒤 구리쇠로 묶어서 광 안에 넣고, 그 위를 다시 석회·황토·고운 모래를 섞어 덮는 것으로 되어 있다.

지석의 유래는 중국 삼국시대의 위(魏)나라에서 역대 황제릉을 세울 때 지나친 노동력과 물자의 낭비를 초래하였기 때문에, 석실·비석·석수(石獸) 등의 석물을 일절 금지하면서부터 비석 대신 지석을 묻은 데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보다 앞서 한대(漢代)에서도 피장자의 이름을 적는 정도의 지석이 있었으나, 본격적인 체제를 갖추어 광중에 넣기 시작한 것은 진대(晋代)를 거쳐 삼국시대일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송대(宋代)의 원가연간(元嘉年間, 424∼453)에 비롯되었을 것으로도 보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 발견된 자료 가운데 가장 오랜 것으로는 고구려의 동수묘지(冬壽墓誌, 357),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 5세기 중엽) 등을 들 수 있으며, 매지권(買地券)으로 알려진 백제의 무령왕릉(6세기 전반)에서 나온 자료도 같은 종류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우리 나라에서는 적어도 삼국시대 중반 이후부터는 지석이 사회적으로 높은 계층에서 사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보다 보편화된 시기는, 현재 300여 개가 발견되고 있으나 앞으로 더 많이 출토될 것으로 보이는 고려시대였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현재까지 100여 점이 정리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상당수가 묘 속에 아직 묻혀 있을 것으로 보아 상당히 많이 퍼졌다고 하겠다.

지석의 종류는 재료·형태·제작방법과 묘지의 내용을 비롯해 시대 및 장소, 그리고 신분에 따라서 다양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재료는 고려시대까지는 대부분이 돌로 되어 있는 데 반해서, 조선시대에는 번자로 된 것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 밖에 돌·흙·석회·종이로 만든 지석도 발견되고 있다. 번자로 된 지석조차도 백자·청자·분청사기 등으로 구분되나, 백자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조선 후기로 내려오면서 석회나 흙을 네모진 조각으로 구워 만든 것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형태는 크게 보아 판형(板形)과 그릇형[器形], 그 밖의 것으로 나누어지며, 판형은 장방형·말각방형·원판형·벼루형 등으로 구분된다. 그릇형으로는 대접·사발·제기·항아리·단지 등의 모습을 한 것이 나타난다. 그리고 묘비형·원통형·기둥형 등도 보인다.

제작방법은 묘지를 기록하는 방법을 말하는 것으로 음각(陰刻)을 하였는가, 붓으로 썼는가, 음각을 하였을 때 상감(象嵌)을 하였는가의 여부, 붓으로 썼을 때에 그 재료는 회회청(回回靑)이나 석간주(石間硃), 혹은 먹으로 썼는가에 따라 각각 다른 차이를 보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글씨체의 종류도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대부분 해서(楷書)로 되어 있다.

그 내용도 앞에서 밝힌 것처럼 묘지와 묘명이 구분될 뿐더러, 단순히 피장자의 벼슬과 이름만을 쓴 것도 있다. 대체로 고려시대에는 묘지명이 압도적인 반면 조선시대에는 주로 묘지가 대부분이며,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단순히 피장자의 벼슬과 이름만을 쓴 것이 많이 보이고 있다.

이 밖에 지석은 원장(原葬)인가, 이장인가에 따라서도 각기 다르며, 부부합장인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도 각각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참고문헌

『세종실록』
『사례편람』
「한국묘지에 관한 연구」(박한설, 『인문학연구』 16, 강원대학교, 1982)
「조선시대 묘지의 종류와 형태에 관한 연구」(최호림, 『고문화』 25, 1984)
「고려묘지명 일람」(김용선, 『한국학보』 36, 1984)
「고려초기의 묘지에 관한 일고찰」(최호림, 『한국학논문집』 6, 한양대학교,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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