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왕은 삼국시대 고구려 제11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227년~247년이며 산상왕의 아들이다. 재위 전반기에는 요동 지방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던 공손씨와 계속 대립하다가 238년에 위나라 군대를 도와 공손씨 세력을 멸망시켰다. 하지만 위나라와 국경을 접하게 되면서 본래의 낙랑군 관할지역을 다시 확보하려던 위의 동방정책과 부딪히게 되었다.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의 침입을 받아 일시 환도성이 함락되는 위기를 겪었지만 밀우·유유 등의 활약으로 그들을 몰아내었다. 동천왕이 승하하자 왕의 은덕을 사모한 많은 백성들이 따라 죽었다고 한다.
동천왕은 ‘동양왕(東襄王)’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우위거(憂位居)’ 또는 ‘위궁(位宮)’이며 아명은 교체(郊彘)이다. 위궁이라는 이름은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능히 사물을 본 것이 할아버지뻘인 태조왕(太祖王) 궁(宮)을 닮았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 한다. 산상왕(山上王)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관노부(灌奴部) 주통촌(酒桶村) 출신의 산상왕소비(小妃)이다. 성품은 관대하고 인자하였다. 213년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부왕이 승하하자 즉위하였다. 요동(遼東) 진출로를 놓고 위(魏)나라를 선제공격했으나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의 침입을 받아 일시 환도성(丸都城)이 함락되는 등 위기를 겪었으며 국세를 만회하는 데 노력하였다.
재위기간의 전반기에는 요동 지방을 중심으로 세력을 떨치고 있던 공손씨(公孫氏)와의 대립이 계속되었다. 그래서 한때 공손씨에게 배반당한 오(吳)나라와 연결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234년 공손씨의 배후에 위치한 위나라가 화친을 희망해 오자 236년에는 오나라 사신의 목을 베어 보냈다. 그리고 237년에는 위의 연호 개정을 축하하는 사신을 파견하는 등 위나라와의 관계를 강화하였다.
마침내 238년에는 위나라 군대를 도와 공손씨 세력을 멸망시켰다. 그러나 공손씨 세력 멸망 이후 위나라와 국경을 접하게 됨에 따라 위와도 긴장관계로 바뀌었다. 그래서 242년 위의 서안평현(西安平縣)을 선제공격하기에 이른다. 이것은 고구려가 242년 당시 촉(蜀)의 강유가 북벌(北伐)을 재개하여 위를 침공한 시기를 노려 요동과 낙랑군(樂浪郡)을 잇는 요충지를 확보하고자 한 것이다.
그 뒤 244∼245년 2년에 걸쳐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의 침입을 받아 수도인 환도성이 함락당해 왕이 남옥저(南沃沮)를 거쳐 북옥저(北沃沮) 방면으로까지 패주하였다. 그러나 밀우(密友) · 유유(紐由) 등의 활약으로 겨우 이를 몰아냈다. 관구검의 군사 행동은 현도태수(玄菟太守) 왕기(王頎)를 거느리고 직접 고구려를 정벌하는 것과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와 대방태수 궁준(弓遵)으로 하여금 고구려에 예속된 동예(東濊)를 정벌케 하는 두 가지 방향에서 진행되었다. 그 결과 낙랑군과 대방군(帶方郡)의 군대는 동예의 항복을 받아 낙랑군에 종속시켰다. 고구려는 이 전쟁으로 인해 환도성이 파괴되어 247년 평양성(平壤城: 현재의 북한 평양이 아니라 국내성 부근에 위치한 임시 도성으로 추정)으로 일시 천도하기까지 했다.
당시 위의 동방정책(東方政策)은 중국 내 삼국 간의 대립 상황에서 후방 안정과 물자 공급을 위해 동이(東夷) 여러 세력들에 대한 통제력의 강화와 교역망의 재편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관구검의 고구려 원정은 위의 동방경영에 있어 가장 위협세력이었던 고구려에 타격을 주려는 목적 외에도 동옥저(東沃沮) 및 동예지역까지 한군현(漢郡縣)의 영향력 아래 두고자 하는 목적이었다. 결국 본래의 낙랑군 관할지역을 다시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원에서의 삼국의 대립 상황과 동이 사회의 성장에 따른 저항으로 인해 이러한 동방정책은 일시적인 것이 되었다.
한편 『삼국사기』에 따르면 245년 고구려가 신라 북변(北邊)을 공격했다든지 248년 신라와 화친관계를 수립했다는 등 동천왕 재위 동안 신라와 일정한 교섭이 있었다고 한다. 이를 두고서 당시 위-고구려전쟁으로 미루어보아 믿기 어렵다는 견해도 있고, 동천왕이 말갈(靺鞨)을 움직여 신라 북변을 침공한 것이라는 견해도 제기되어 있다.
248년에 왕이 승하하자 왕의 은덕(恩德)을 사모해 많은 백성들이 따라 죽었다. 그리고 백성들이 나무[柴]로 죽은 사람들을 덮어 주어 장지를 시원(柴原)이라 하였다. 현재 평안남도 강동군 마산면에 동천왕릉(東川王陵)이라 전해지는 고구려 봉토분(封土墳)이 있다고 하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