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 ()

목차
관련 정보
고대사
개념
중국 동북방에 분포한 민족을 중국인[漢族]이 부르던 종족명칭.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동이는 중국 동북방에 분포한 민족을 중국인[漢族]이 부르던 종족 명칭이다. 중국역사 초기에 등장하는 ‘동이’라는 개념은 중국의 한문화(漢文化)와 상대적인 문화개념으로 호칭된 것이다. 진나라의 중국 통일 이전에는 방위 개념에 따라 산둥반도 등 동쪽의 변방까지를 포함하여 동이라 하였으나 중국 통일 후에는 만주와 한반도 지역의 특정 종족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성격이 점차 바뀌었다. 한민족의 근간이 된 예맥족이 포함된 동이족은 중국의 한족과 대립하면서 중국 및 북방 종족들과도 다른 독특한 문화전통을 유지·발전시킨 종족이라 할 수 있다.

정의
중국 동북방에 분포한 민족을 중국인[漢族]이 부르던 종족명칭.
개설

‘동이(東夷)’란 특정한 종족을 지칭하기보다는 중국의 한문화(漢文化)와 상대적인 문화개념으로 호칭된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한족과는 종족 · 언어상으로 구분이 된다. 이들은 태호(太皡) · 소호(小皡) · 유제(有濟) · 서방(徐方) · 제부(諸部) · 풍족(風族)이 있었다.

연원 및 변천

동이의 시원과 종족적 성격 · 활동범위 · 문화단계에 대해서 고대부터 깊은 관심이 있어 왔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동이라는 기록이 나온 이래 기자(箕子)와 관련지어 관심을 가졌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은 동이를 상고사 문제와 관련시켜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한치윤(韓致奫)『해동역사(海東繹史)』에서 단군조선보다 앞서 동이총기(東夷總記)를 두고 동이족에 대한 중국의 고기록들을 정리하였다.

중국인들도 자국의 상고문화와 관련해 선진문헌(先秦文獻)부터 현대까지 동이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이(夷)는 “종대종궁동방지인야(從大從弓東方之人也)”라고 하여 대궁(大弓)과 관련해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유궁(有窮: 지금의 산둥성 덕현)의 군주 예(羿: 하나라의 제후로 궁술에 능한 명인)와 회수(淮水) 유역의 서언왕(徐偃王), 고구려의 주몽(朱蒙) 등 동이계의 수장(首長)들에게는 궁시설화(弓矢說話)가 있어 동이족은 활을 잘 쏘는 민족임을 뒷받침하고 있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전에는, “동방을 ‘이(夷)’라 한다. ‘이’라고 하는 것은 뿌리이다. 말하기를, 어질고 살리기를 좋아한다고들 한다. 모든 것은 땅에 뿌리박고 있으므로 천성이 유순하고 로써 다스리기 쉬워서 군자가 죽지 않는 나라가 있게 된 것이다.”라고 하여 ‘이’의 문화적 특성과 동경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견이(畎夷) · 우이(于夷) · 방이(方夷) · 황이(黃夷) · 백이(白夷) · 적이(赤夷) · 현이(玄夷) · 풍이(風夷) · 양이(陽夷) 등 9종으로 분류해 기술하고 있다.

이 밖에도 『논어(論語)』 · 『예기(禮記)』 · 『산해경(山海經)』 등에 동이에 대한 언급이 있으며, 『사기(史記)』 · 『전한서(前漢書)』 · 『후한서(後漢書)』 · 『삼국지(三國志)』 · 『송서(宋書)』 · 『남제서(南齊書)』 · 『위서(魏書)』 등의 사서에서는 논찬(論贊) · 평어(評語) 등에 역사적 사실과 함께 시대에 따라 변하는 동이에 대한 인식을 기술하고 있다.

내용
  1. 종족적 성격

‘이(夷)’라는 말은 산둥반도로부터 회사(淮泗) 유역, 즉 현재의 장쑤성(江蘇省) · 안후이성(安徽省) · 황해 연안 등에 분포된 이들 집단이 한족과 접촉을 시작하는 은대(殷代)부터 역사에 등장하였다. 은 말기에는 인방(人方)으로 불리었으며, 시방(尸方) · 이방(夷方)으로도 불렸다. 은으로부터 대규모의 정벌을 당하기도 하였다. 은대의 갑골문(甲骨文)에도 ‘이’에 대한 기록이 보이며, 시조의 난생 설화나 분포지 등을 고려할 때 동이라는 견해가 통용되고 있다.

특히 서주(西周)시대 때 동이의 대표적 수장인 서언왕(徐偃王)의 시조 난생설화는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의 설화와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은의 시조신인 순(舜)임금도 동이족이다. 그리고 은이 하를 멸망시키는 데 이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서주시대의 금석문에는 동이 · 남이 · 회이라는 명칭이 보인다. 중국인들이 점점 여러 종족의 차이를 인식하면서 ‘만(蠻)’ · ‘융(戎)’ · ‘적(狄)’의 구분이 생기고, 그 뒤 음양오행사상이 발달함에 따라 방위개념이 첨가되어 동이 · 서융(西戎) · 남만(南蠻) · 북적(北狄) 등의 명칭으로 고정되었다. 『관자(管子)』에도 이러한 구분이 표현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중국역사 초기에 ‘동이’라는 것은, 한족이 동방의 이민족에게 붙였던 범칭으로서 특정한 종족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라기보다는 방위개념을 첨가한 한족에 대한 상대적인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족의 활동영역이 확대되고 지리적 지식의 양이 증가하면서 점차 일정한 종족적 개념의 성격을 띠게 된 것이다.

  1. 동이의 범주

동이족은 중국의 서북부에서 수렵생활을 하다가 동으로 이동해, 한 줄기는 산둥반도(山東半島) 방면으로, 다른 한 줄기는 다시 동으로 나와 만주 · 한반도 일대에 분포하였다. 동이족의 적용범위는 진나라의 통일을 전후해 다르게 나타난다. 진나라의 통일 이전에는 한족과 대립관계를 가지고 황허(黃河) · 화이허(淮河) 유역을 중심으로 중국 동북부와 북만주일대, 한반도 등 기타지역에 거주하는 북방 몽골리안계 종족을 일컬었다. 이들은 환황해연안 지역에 분포했으며 중국 한족과는 갈등 혹은 협력 관계를 유지하면서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진나라가 통일을 한 뒤에는 산둥반도의 일부가 중국역사에 흡수 · 동화됨으로써 발해만을 끼고 만주와 한반도로 분포한 한 · 예맥(韓 · 濊貊)을 ‘동이’라 불렀다. 『설문(說文)』에는 예맥(濊貊)을 동이를 가리키는 이름이라고 하였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의 서(序)에 ‘진병육국기회사이개산위민호(秦竝六國其淮泗夷皆散爲民戶)’라는 기록은 이러한 역사적인 상황을 반영한다.

한편, 『후한서』와 『삼국지』의 동이전에는 부여 · 고구려 · 백제 · 신라 · 마한 · 진한 · 변한 등 현재 우리 민족과 직접 관련 있는 나라들이 나타난다. 다만 현재는 우리와 민족 및 역사를 달리하고 있는 읍루(挹婁) · 왜(倭) 등이 포함되어 있어 신중한 판단이 필요하다.

이와 같이 동이의 범주에 관해서는 나라와 학자 또는 시대에 따라 서로 다른 견해가 나오고 있다. 동이에 관해서는 흑도문화(黑陶文化)와의 관련성, 민무늬토기, 청동기문화의 담당자로서의 역할과 구체적인 종족적 특징 등 앞으로 연구되어야 할 과제가 많다. 또한 역사적인 실체로서 거주지역 및 유적유물조사, 황해 연안에서의 해양문화 담당 등 구체적인 활동 모습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동이가 한민족의 근간이 된 예맥족을 포함하고 있으며, 중국의 한족과 대립하면서 중국 및 북방종족들과는 다른 독특한 문화전통을 유지 ·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1. 동이와 기자조선과의 관계

동이는 기자조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있다. 이 견해는 흑도문화가 동이의 분포와 일치하고 룽산문화(龍山文化)가 은문화로 연결이 되는 것으로 전제하고, 은나라는 동이족의 한 부류이며 따라서 은나라의 후예인 기자가 세운 기자조선은 동이족이 세운 나라라는 것이다. 그러나 은나라와 동이의 종족적 관련성을 부인하는 견해도 있다. 설사 기자가 은나라의 후예이고 은나라가 동이의 하나라 하여도 동이가 한민족이며 동이문화가 곧 고조선문화라는 등식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참고문헌

『해동역사(海東繹史)』
『설문해자(說文解字)』
『논어(論語)』
『예기(禮記)』
『산해경(山海經)』
『사기(史記)』
『전한서(前漢書)』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
『송서(宋書)』
『남제서(南齊書)』
『위서(魏書)』
「황해문화권(黃海文化圈)의 형성(形成)과 해양활동(海洋活動)에 대한 연구」(윤명철, 『선사(先史)와 고대(古代)』11, 1998)
「중국동부해안지역(中國東部海岸地域)과 한반도」(윤내현, 『장보고』, 이진출판사, 1993)
「동이(東夷)의 개념(槪念)과 실체(實體)의 변천(變遷)에 관한 연구(硏究)」(기수연, 『백산학보(白山學報)』42, 1993)
「선진문헌(先秦文獻)에 보이는 ‘동이(東夷)’의 성격」(이성규, 『한국고대사논총(韓國古代史論叢)』1, 한국고대사회연구소, 1991)
「민족기원고(民族起源考)」(권태원, 『충남사학(忠南史學)』1, 1985)
「중국고대인(古代中國人)의 한국관(韓國觀)」(전해종, 『진단학보(震檀學報)』46·47합집, 1975)
「한예맥이동고(韓濊貊移動考)」(김상기, 『동방사논총(東方史論叢)』, 1974)
「동이(東夷)와 회이(淮夷)·서융(西戎)에 대(對)하여」(김상기, 『동방사논총(東方史論叢)』, 1974)
「기자고(箕子考)」(천관우, 『동방학지(東方學志)』15, 1954)
『東夷源流史』(何光岳, 江西敎育出版社, 1990)
『中國史前史話』(徐亮之, 臺北華正書局, 1977)
『中國民族史』上(林惠祥, 臺灣商務印書館, 1983)
「夷夏東西說」(傅斯年, 慶祝蔡元培先生 六十五歲論文集, 1935)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