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는 한 사회의 개인이나 인간 집단이 자연을 변화시켜온 물질적·정신적 과정의 산물이다. 서양에서 문화는 경작·재배 등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는데, 정치나 경제, 법과 제도, 문학과 예술, 도덕, 종교, 풍속 등 인간의 모든 산물이 포함되며, 인간 집단의 생활양식과 상징체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문화는 담론에 따라 교양으로서의 문화, 진보로서의 문화, 예술 및 정신적 산물로서의 문화, 상징체계 혹은 생활양식으로서의 문화 등으로 다양하게 정의된다. 문화의 본질적 기능은 사회의 재생산이며 긴 기간을 통해 변동해 가는 특징이 있다.
문화라는 용어를 한 마디로 정의하기란 불가능하다. 문화는 그것이 속한 담론의 맥락에 따라 매우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는 다담론적 개념이다. 서양에서 문화(culture)라는 말은 경작이나 재배 등을 뜻하는 라틴어(cultus)에서 유래했다. 즉, 문화란 자연 상태의 사물에 인간의 작용을 가하여 그것을 변화시키거나 새롭게 창조해 낸 것을 의미한다. 자연 사물에는 문화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지만, 인위적인 사물이나 현상이라면 어떤 것이든 문화라는 말을 붙여도 말이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야생화 문화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지만 원예 문화라는 말은 성립한다. 즉 가장 넓은 의미에서 문화는 자연에 대립되는 말이라 할 수 있고, 인류가 유인원의 단계를 벗어나 인간으로 진화하면서부터 이루어낸 모든 역사를 담고 있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정치나 경제, 법과 제도, 문학과 예술, 도덕, 종교, 풍속 등 모든 인간의 산물이 포함되며, 이는 인간이 속한 집단에 의해 공유된다. 문화를 인간 집단의 생활양식이라고 정의하는 인류학의 관점이 이런 문화의 본래 의미를 가장 폭넓게 담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문화라는 말은 그렇게 넓은 의미로만 사용되지는 않으며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된다. 문화에 대한 정의가 다양할 수밖에 없는 것은 엄청나게 광범위한 인간적 산물들의 관계를 이해하는 방식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문화는 역사적 시대, 사회 집단, 이데올로기적 입장에 따라 다양하게 정의되어 왔다. 이는 인간이 창조한 사회적, 역사적 산물을 두고 인간들이 벌이는 권력 다툼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권력 다툼이란 결국 모든 인간적 산물들의 소유와 배분을 둘러싼 다툼이고, 궁극적으로 문화를 둘러싼 다툼이기 때문이다. 문화에 대한 다양한 정의 방식 가운데 대표적인 몇 가지만 살펴보기로 한다.
19세기 매슈 아놀드(Mathew Arnold) 같은 사람들에 의해 대표되는 서구 문학비평에서 문화는 흔히 인간 사고와 표현의 뛰어난 정수라는 의미로 정의되었다. 여기에는 위대한 문학, 미술, 음악 등에 대한 지식과 실천을 통한 정신적 완성의 추구라는 열망이 담겨 있다. 예컨대 우리가 문화인이라는 용어를 쓸 때 흔히 그것은 뛰어나고 수준 높은 교양을 가진 사람을 의미하게 되는데 바로 그 문화의 개념이 그것이다. 이런 문화 개념에 기초하여 오래 동안 비평가들은 최상의 작품을 찾는데 몰두해왔고 문화란 뛰어난 것을 판별하고 감상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산업사회가 도래하고 대중사회가 형성되면서 이런 뛰어난 교양으로서의 문화를 갖춘 엘리트층의 지배가 도전받게 되었을 때, 이런 문화 개념의 옹호자들은 물질 문명과 과학기술, 정치, 경제와 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문화의 개념을 더욱 방어적으로 고수했다. 대중문화와 대립하는 ‘고급문화(High Culture)’의 개념을 통해 기존의 엘리트적 문화관을 고수하며 대중문화를 저급한 것으로 치부하는 논리나 이른바 순수문화를 주장하였다. 그 결과는 정치, 경제적 영역과 단절된 문화 영역의 분리였다.
문화는 한 사회의 정신적, 물질적 발전 상태를 의미하는 경우도 있다. 이때의 문화는 문명(civilization)이란 개념과 혼용되기도 한다. 이는 다윈의 진화론의 패러다임을 인간 사회에 적용한 사회진화론적 관점과 관련된다. 서구 문화를 아시아, 아프리카 등의 문화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서구 제국주의의 문화관이 그런 것이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문화와 문명이 구분되기 시작하여 문화는 정신적 발전 상태를, 문명은 물질적 발전 상태를 지칭하는 말로 쓰이게 된다. 문화와 문명을 사회진화론적 관점으로 보는 시각은 아직도 널리 퍼져 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고 보는 서구중심주의적 입장은 콜럼버스 이전에 이미 아메리카 대륙에 살면서 독자적인 문화를 구축하고 있던 원주민 인디언의 문화를 부정하는 관념에 입각해 있다. 문화란 서구의 것이고, 인디언은 문화를 가지지 못한 야만적 존재로 여겨진다. 그런 의미에서 미개 또는 야만에서 문화로의 진보라는 관점은 자민족중심주의를 구성하는 주요한 요소이다.
현대사회에서 문화는 주로 정신적이거나 지적이고 예술적인 산물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신문의 문화면은 문학, 예술, 종교, 학문, 교육, 패션, 방송, 영화 등의 주제로 구성되며, 이는 신문의 다른 면을 구성하는 정치, 경제, 사회 등의 영역과 구분된다. 문화를 이렇게 인간의 정신 활동과 관련된 몇 가지 영역으로 정의하는 방식에는 문화를 물질적 생산이나 분배를 둘러싼 사회관계와 분리해 사고하는 관념이 깔려 있다. 여기에는 흔히 배타성, 순수성, 전문성과 같은 개념이 개입한다. 문화는 사회와 무관한 순수한 것이며 고유의 배타적인 영역으로 존재한다는 생각은 이런 식의 문화 개념에서 쉽게 나타나곤 한다. 이렇게 문화를 인식하는 것은 ‘교양으로서 문화’ 개념을 대중문화에까지 확장하면서도 유구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이분법적 사고를 벗어나지 못 한 것이다.
사회학이나 인류학에서는 흔히 문화를 인간의 상징체계, 혹은 생활양식으로 정의한다. 인간은 상징체계를 통해 사회를 경험하고 인식하며 다른 인간과 상호작용과 의사소통을 한다. 인간이 한 사회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그 사회에 이미 존재하는 상징체계를 습득하여 사용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이며, 그 상징체계가 반영하고 있는 사회의 질서와 규범, 즉 생활양식을 따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양상이 가장 전형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인간의 언어생활이다. 예컨대 한국어에서는 지위, 연령에 따라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다. 그러한 언어 규범은 한국 사회의 가부장적 위계질서의 전통을 반영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러한 언어 규범에 따라 말을 할 때 한국어의 언어 체계가 담고 있는 가부장적 위계질서에 따르게 됨을 의미하게 된다. 그렇게 보면 사회에서 의미질서, 혹은 상징체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의사소통 그 자체가 문화임을 알 수 있다. 문화를 상호작용과 의사소통, 혹은 그것의 기반이 되는 상징체계라 할 때, 그것은 단순히 정신적 작용의 산물이 아니라 한 사회의 관습, 가치, 규범, 제도, 전통 등을 포괄하는 총체적인 생활양식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문화를 개인, 집단, 종족의 총체적인 생활양식으로 정의할 때 집단 사이의 문화적인 차이는 위계의 문제가 아니라 ‘차이’의 문제로 인식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러한 문화 개념은 앞에서 설명한 문화 개념의 정의 방식들에 비해 좀 더 다원주의적인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문화를 인간 집단이 만들어낸 모든 생활양식과 상징체계라 할 때 그것을 구분하는 방식은 엄청나게 다양할 수 있다. 조금 좁은 의미에서 정치나 경제 등의 영역을 떼어 놓고 본다 해도 마찬가지다. 우선 문화를 공유하는 집단에 따라 구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한국 문화라면 한국인이라는 집단이 공유한 문화이고, 미국 문화는 미국인이 공유한 문화가 된다. 한 사회에서 집단을 나누는 기준은 성, 세대, 계급, 지역, 인종, 직업 등 다양하며, 이 다양한 기준들이 수많은 집단을 만들고 이들은 각기 독특한 자기 문화를 공유한다. 이 하위집단의 문화를 하위문화(subculture)라 하는데 결국 문화는 수많은 하위문화들의 집합인 셈이다.
그 수많은 문화들이 똑같은 가치와 권위를 부여받는 것은 아니다. 권력이 강한 집단의 문화는 그만큼 강한 힘을 갖고 약한 집단의 문화는 사회 내에서 권력 소유 집단의 문화에 의해 억압과 차별을 받는다. 흔히 사회의 지배 세력이 가진 문화를 지배 문화라 하고, 피지배층의 문화를 피지배 문화라 표현한다. 피지배 집단이 지배 집단에 저항하면서 생성하는 문화를 저항문화라 표현한다.
눈에 보이는 물질적 속성을 갖느냐, 가지지 않느냐에 따라 물질 문화와 정신 문화로 나누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구분이 생각보다 명료하지 않은 경우도 많다. 예컨대 어떤 사람의 물질적 소비 행위는 그의 정신 상태를 표현하거나 반영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문화의 심미적 수준에 따라 고급문화(High Culture)와 저급문화(Low Culture)를 구분하기도 한다. 대개 고급문화는 주로 서양에서 비롯된 예술적 전통의 맥락에 있는 문화를 의미하고 저급문화는 대량생산된 대중문화 산물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고급문화와 저급문화는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아니고, 역사적으로 변화하는 유동적이며 자의적인 구분일 따름이다.
문화의 기능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은 사회의 재생산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는 그 사회의 생활양식이자 상징체계다. 인간이 한 사회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그 사회에 이미 존재하는 삶의 양식과 상징체계를 습득하여 사용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이고 이는 그 삶의 양식과 상징체계가 반영하고 있는 사회의 질서와 규범, 가치를 따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화는 천성적으로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교육되는 것이다.
모든 문화는 역사 속에서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즉 문화는 결코 자연(Nature)이 아니다. 그렇지만 모든 문화는 마치 고정불변하고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 즉 자연적인 것처럼 표상된다. 상징적이고 사회적인 현상인 문화가 마치 자연적인 것처럼 표상되는 속성을 자연화(naturalization)라 한다. 기본적으로 한 사회의 문화는 그런 자연화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주어진 문화를 거부하거나 새로운 것을 추구할 때에는 항상 크고 작은 억압과 징벌이 가해진다. 그러나 역사의 어느 시점에나 주어진 문화를 거부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그들이 억압과 징벌을 극복하면서 문화가 변화한다. 문화가 변화하면 그만큼 사회도 변화하는 것이다. 결국 문화는 사람들을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편입시키고 기존의 삶의 양식과 상징 체계를 교육함으로써 사회를 재생산하지만 끊임없이 균열을 일으키며 조금씩 변화되어 간다.
사회 구성원들을 사회체제에 편입시키면서 사회를 재생산하는 문화의 기능은 문화가 이데올로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다양한 문화적 기제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주어진 문화에 순응하게 함으로써 기존의 사회 체제를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기능을 한다.
오랜 역사 동안 오로지 자신들만의 문화를 고수하며 유지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역사 속에서 인간 집단은 끊임없이 이동하며 이질적 집단과 접촉하고 충돌, 갈등, 융화해 왔다. 그렇게 서로 다른 문화들이 접촉하여 서로 간의 문화 요소가 전파되고 새로운 문화로 변화해 가는 과정을 문화접변(acculturation)이라 한다. 이러한 문화접변을 통해 문화변동이 이루어지고 다양한 혼종의 문화(hybrid culture)가 탄생하게 된다. 문화 간의 동등한 상호 교류를 통해 문화접변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문화접변은 강한 문화가 약한 문화를 침탈하고 지배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아메리카나 아프리카를 침략하면서 서구 문화가 제3세계의 문화를 변화시킨 것이 그런 예이다.
문화 변동은 한 순간에 급속도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장기지속적인 과정이다. 따라서 문화 변동 과정에서 기존 문화와 새롭게 출현한 문화간의 모순과 갈등이 발생할 수 있다. 또한, 물질 문화나 새로운 기술의 도입에 문화가 충분히 적응하지 못 하는 문화 지체(cultural lag)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 예를 들어, 컴퓨터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새로운 미디어들이 등장하지만 이에 조응하는 제도와 의식은 미처 형성되지 못 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문화 지체 현상이 있을 때 심각한 사회적 부조화 현상이 발생하기도 한다.
문화사를 간략히 서술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문화의 범위가 워낙 방대한 까닭이다. 여기서는 역사적 전개와 함께 변화해 온 종교와 풍속, 예술 등 몇 가지 기본적인 사실들만 간략히 서술할 수 있을 뿐이다.
언제부터 한민족이 한반도에 자리잡고 살았는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기원전 2,000∼3,000년경으로 추정된다. 흔히 한민족이 단일민족이라는 상식이 존재하지만 사실상 오랜 역사 속에서 다양한 민족이 섞이면서 이어져 왔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상고시대의 한민족은 한반도와 동북쪽의 만주 및 시베리아 연해주, 서쪽의 요동반도까지 걸쳐 있었고 청동기시대로 오면서 한반도 주변에 여러 개의 부족국가들이 형성되는데, 그 중 가장 강력한 세력을 형성한 것이 고조선이다.
고조선 시대의 문화에서 중요한 것은 제천의식이다. 온 나라 사람들이 모여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여러 밤낮을 음주가무로 즐겼다고 한다. 이 제사가 곧 굿이고 왕이 무당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음악, 미술, 무용 등 다양한 한국 예술은 이런 전통에서 유래하여 분화되었다.
삼국시대에 오면 국가체계가 확립되면서 왕권이 강화되고, 정치 권력과 종교 권력이 분리된다. 특히,중국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불교와 도교, 유교 문화가 수입된다. 이 시대에는 중국 뿐 아니라 일본 등과도 다양한 문화적 교류가 이루어졌다. 삼국통일과 함께 신라어가 중앙 언어로 통용되게 되고, 중국과의 관계도 더욱 밀접해진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지배문화적 지위를 가진 것은 불교 문화였다. 하지만 민간 차원에서는 무속 등 토속 신앙이 존재했다. 고려시대에는 목판 인쇄술과 금속활자, 고려청자 등 민족 문화의 뛰어난 유산들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조선왕조는 처음부터 유교를 기본 이념으로 하는 양반 지배 사회를 확립하였고 폐쇄적이며 배타적인 신분 사회를 유지했다. 유교가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면서 불교와 무속은 탄압받았다. 세종 시대에는 한글이 창제되고 다양한 학문과 기술, 제도의 발전이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이후 조선 왕조는 극심한 당쟁과 양반 사회의 부패 등으로 쇠락의 길을 걸었다.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을 겪으며 민중의 삶이 피폐해졌고 많은 국가유산이 소실되기도 했다. 임진왜란은 조선의 도자기 기술과 유학이 일본에 전파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조선 후기에는 한족인 명나라를 숭배하는 사대부(士大夫)들의 사대주의(事大主義)가 극성을 부리면서 왕권은 크게 약화되었고 민중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다.
17세기부터는 청나라를 통해 서학(西學)이라는 이름으로 기독교 문화와 서양의 발전된 문화와 문물이 전해지기도 했다. 이와 같은 사조에 영향을 받아 성리학의 경직성을 비판하며 실사구시의 학문적 태도를 강조하고 새로운 문화와 문명을 도입하려 했던 실학 사상이 싹트기도 했다. 조선 후기 천주교는 일부 양반층을 넘어 일부 소외된 서민층에게까지 퍼졌다. 그러나 천주교와 서학 사상은 조선 사회를 변화시킬만한 사회적 세력을 형성하지 못했다. 19세기 후반으로 가면서 조선사회는 안팎으로부터 강력한 변화의 요구에 직면하게 된다. 외세의 문호개방 요구가 거세지고 농민 반란이 격화되는 한편으로 친일개화파가 등장하고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갑오농민전쟁, 갑오개혁 등을 거치면서 유교적 질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선 사회가 자생적으로 근대화할 가능성을 갖기 전에 결국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다.
19세기 말 이후 한국의 역사는 서양의 근대를 수입 모방하면서 따라잡기 위해 몸부림쳐 온 역사라 말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에 의해 일본 문화와 일본화된 서구 문화가 들어왔고, 해방 이후에는 주로 미국에 의해 근대적인 문화와 문물이 수입되었다. 일제 식민지 기간을 통해 근대적인 교육제도와 기술, 자본주의적 시장제도와 산업 시스템이 도입된 것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또한 근대적 대중문화를 형성하는 영화와 방송, 대중음악 등 매스미디어가 일제 식민지 시대에 들어왔고 이를 통해 서양식 대중문화가 빠르게 유입되면서 한국 대중의 문화적 감수성을 크게 변화시켰다.
하지만 일제에 의한 식민지배는 근대화의 과정을 왜곡시켰다. 식민지배는 무엇보다도 피식민지인들에게 자기 존중감과 자부심을 잃게 한다. 35년간의 식민지 체험은 한국인들에게 식민화된 의식을 남겨 놓았다. 자기비하와 열등감은 식민지 의식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이런 자기 부정의 의식은 권위에 대한 복종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한다. 일제 식민지 체험은 한국 사회의 권위주의와 서열의식을 더욱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지배이데올로기로서 유교의 공식적 지위는 부정되었지만 기존 유교적 규범의 왜곡된 측면은 더욱 강화된 것이다. 일제는 억압적 관료체제를 갖추고 한국인들의 복종을 유도하기 위해 충(忠)과 효(孝)라는 유교적 가치를 강조했다. 이는 천황의 권위와 가족 단위의 호주권을 동일시하면서 호주에 대한 순종을 천황에 대한 복종으로 연결시키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실시된 식민지 교육은 대체로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교육 내용을 식민지에 적용한 것이었다. 이들이 만든 교과서에는 근대적 요소들과 함께 충효사상 등 유교적 요소들이 적지 않았다. 1931년의 만주사변으로부터 시작해 1941년 태평양전쟁을 거치면서 천황에 대한 충성이 강조되고 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의 표어가 내걸리며 우리 말과 글을 없애고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이데올로기 교육이 강화되었다.
일제강점기 근대적인 매스미디어가 도입되면서 특히 서울 등 대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서구화된 문화와 감성이 빠르게 확산되었다. 1930년대에는 서구식 패션이 유행하였으며, 유성기가 보급되었고, 영화 관객이 늘어났다. 다방과 카페, 댄스 홀 등 서구식 유흥과 오락이 등장했고 서구식 생활 양식을 추종하는 모던 보이, 모던 걸이 나타나기도 했다. 하지만 1940년대부터는 전시체제가 본격화되고, 전체주의적 국가주의가 더욱 강화되면서 서구식 문화는 억압되었다. 일제 말기에는 한국의 문인, 언론인 등 친일 지식인들까지 나서서 젊은이들에게 천황을 수호하고 태평양 전쟁의 승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강제하기도 했다.
일제 식민 지배로부터 해방된 1945년에서 1948년 사이의 미군정기와 1950년부터 3년간 벌어진 한국전쟁은 한국 사회의 정치와 경제뿐 아니라 문화 변동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미군정기를 거치면서 이른바 자유민주주의의 가치가 내세워졌지만 실제로는 민주주의의 가치보다 조선시대부터 일제 시대를 거치며 지배적 가치로 작용해 온 유교적 가치가 더욱 위력을 발휘했다. 유교적인 충(忠)의 가치는 천황을 대신해 국가에 대한 충성이란 개념으로 바뀌었다. 가부장적 가족 질서를 대변하는 효(孝)의 가치 역시 여전히 강력한 가치로 작용했다. 남북 분단과 함께 충효의 이데올로기는 반공 이념과 결합하면서 국가의 수직적 권력 체계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했다.
이런 양상은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분단 체제 하에서 국가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충효사상과 결합한 반공이데올로기는 권력에 대한 모든 반대와 저항을 무력화시키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하였다. 반공이데올로기가 지배하면서 권위주의와 획일주의, 가부장주의, 국가주의 등이 강화되었고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사정없이 억압되었다.
20세기 전반기에 주로 일본 문화와 일본을 통해 들어온 서구 문화의 영향을 받았던 한국 사회는 이제 미국을 통해 직수입된 서구 문화의 압도적 영향 속에서 급속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권위주의와 가부장주의, 국가주의가 온존되고 강화되는 한편으로는 서구의 문물과 서구적인 소비 문화, 유흥 문화가 급속히 유입되면서 커다란 가치관의 혼돈이 배태되었다. ‘자유부인’ 논쟁이나 ‘박인수 사건’ 등 전쟁이 끝난 1950년대 후반 사회적으로 논란을 빚었던 풍속 사건들은 바로 그런 혼돈의 양상을 잘 보여준다.
1961년 5 · 16 군사쿠데타와 함께 시작된 박정희 군사 정권은 강력한 경제성장 정책을 추진하면서 근대화를 사회적 목표로 내세웠다. 군사 정권이 말하는 근대화는 산업화를 통한 경제의 양적 성장을 의미하는 것이었을 뿐 서구적 의미의 합리적 근대화와는 다른 것이었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반공주의를 더욱 강화하고 충효사상을 통치의 도구로 사용하였다. 국민윤리라는 교과목이 생기고, 대학에 국민윤리학과가 설립되었으며, 초중고교 교육을 통해 반공과 충효라는 체제 유지를 위한 이데올로기가 교육되었다. 1968년에는 일제의 ‘교육칙어’를 모방한 ‘국민교육헌장’을 제정해 학생들이 암송하도록 강제했다. 매일 저녁 국기 하강식이 열리고, 영화관에서 애국가가 불려지고 ‘국기에 대한 맹세’가 암송되는 등 체제 순종적인 ‘국민’을 만들기 위한 이데올로기 장치들이 일상적으로 작동했다. 군사정권은 국민총화를 내세우며 국가 정책과 권력에 대한 일체의 저항과 갈등을 불온한 것으로 간주하여 탄압하였다. 젊은이들의 장발과 미니스커트까지 단속당한 데서 보듯 시민들의 주체적인 권리나 사생활조차도 침해당했다. 연극, 영화, 가요, 소설 등 문화예술은 검열과 금지의 대상이 되었고 학문의 자유도 보장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은 유신체제의 몰락 이후 이어진 1980년대의 군사 정권 하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채 지속되었다.
1970, 1980년대 군사 정권 시대에는 대학과 종교계, 노동계 등을 중심으로 군사 정권에 저항하고 민주화를 추구하는 사회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런 사회 운동은 정치, 경제적 민주화와 함께 인간 해방, 노동 해방, 민족 해방의 담론을 전개했고, 이러한 정신을 담은 다양한 문화가 생산되었다. 이런 저항적 하위문화는 대중매체를 비롯한 공식적 공간에서는 접근할 수 없었고, 자연스럽게 학생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권 문화, 혹은 민족문화, 민중문화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는 문학, 연극, 영화, 미술, 음악, 출판 등 다양한 문화 장르와 진보적인 이념과 사회 의식, 역사관, 라이프 스타일 등 폭넓은 문화 영역을 아우르며, 당대의 젊은 지식인들과 진보적 노동자, 농민, 종교인 등에게 확산되었다.
1987년 민주화운동과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한국 사회는 형식적, 절차적 민주화를 이루었고 그와 함께 세계화와 정보화라는 세계적인 변화의 물결에 빨려 들어갔다. 1990년대는 민주화와 함께 사회적, 문화적 자유의 폭이 크게 넓어졌고 정보화의 물결 속에서 대중매체가 급증하였고, 컴퓨터와 인터넷이 빠르게 보급되면서 일상 문화가 크게 변화했다. 특히 영상 미디어의 세례를 받으며 성장한 신세대 청소년 층을 주축으로 한 신세대 문화가 기성 세대의 문화와 충돌을 일으켰다. 개성과 자유를 추구하는 신세대 문화는 기존의 정신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문화와는 다른 욕망과 소비의 문화를 형성하였다. 신세대 문화의 등장과 함께 육체 문화, 소비 문화 담론이 크게 유행했다. 그렇지만 민주화 이후의 문화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기존 유교적 권위주의, 반공주의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강고하게 유지되었고 과거의 문화와 새로운 문화 사이의 갈등은 몇 차례의 정치적 변화와 연결되며 지속적으로 사회적 갈등을 야기했다.
1970∼1980년대에는 한국사회의 문화를 ‘민족문화’라는 차원에서 인식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당시의 문화 관련 담론에서 민족문화는 매우 모순적인 성격을 드러내었다. 당시 지배 권력과 저항세력이 모두 민족문화를 강조하였다. 유신 정권은 문화적 민족주의를 일종의 통치 이데올로기로 이용하였고, 그 과정에서 젊은이들의 외래문화 수용을 강력하게 단속하고 억압하였다. 1980년대에 전두환 군사정권은 ‘국풍81’ 같은 행사를 개최하고 씨름 같은 민속 경기를 활성화시키는 등 전통에 기반을 둔 민족문화 담론을 체제 정당화를 위해 확산시켰다. 그에 반해 1970, 1980년대의 저항세력은 또 다른 차원에서 민족문화를 주창했다. 그들에게 민족문화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 세력의 문화적 침탈에 대한 거부와 저항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동시에 현실의 모순을 고발하고 개혁하는 진보의 이데올로기를 담은 문화였다. 그래서 그들은 단순히 전통문화를 복제하고 복원하는 식의 ‘박제화된 민족문화’를 거부했다. 그 보다는 전통적인 문화의 형식과 정신을 계승하면서 분단과 반민주주의적인 당대의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문제의식을 담고자 했다.
저항세력의 민족문화론에서 중요한 이론적 틀이 되어준 것이 문화 제국주의론이다. 문화 제국주의론은 1970년대 이래 선진 자본주의 국가와 제3세계 사이의 지배와 종속 관계를 설명하는 이론으로 폭넓게 받아들여졌던 종속이론의 틀을 문화 영역에 적용시킨 이론이다. 경제적으로 지배적인 위치에 있는 국가가 주변국가에 대해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지배를 확대 강화해가는 현상을 제국주의라 하는데, 문화제국주의는 바로 그러한 제국주의적 현상의 문화적 차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영화나 TV 프로그램, 음악 같은 문화상품과 유행, 스타일 등이 지배국가로부터 종속국으로 전파되어 지배국가의 문화적 가치와 이데올로기가 강화되고, 종속국의 전통문화가 파괴되며 지배국가의 이익이 보장되는 수요와 소비 행태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1970∼1980년대 민족문화론은 문화 제국주의론 혹은 문화종속론의 이론적 전제를 받아들이면서 제도권의 대중문화를 문화 제국주의의 산물이라고 비판했다. 그와 함께 반제국주의적 의식과 내용을 민족문화의 중요한 요소로 간주해왔다.
1980년대 말부터 선진국 중심의 시장 개방 압력이 가중되고 그와 함께 문화시장 개방이 가속화되면서 세계적으로 문화시장의 구도는 크게 변화하게 된다. 세계적으로 문화산업이 팽창하면서 초국가적인 문화산업이 전지구를 시장으로 삼아 경쟁을 벌이는 현상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1980년대부터 이루어진 일련의 탈규제정책과 시장 개방 정책은 문화산업의 영역에서 국가간 장벽을 사실상 철폐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무엇보다도 냉전체제의 종식과 함께 사회주의가 몰락하면서 전세계는 거대한 하나의 문화시장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물결은 선진국의 거대 자본이 전세계를 자유롭게 시장으로 확보할 수 있게 했다. 일본의 자본이 미국에 들어가 영화사를 사서 영화사업을 벌이고, 미국의 자본이 영국에서 케이블TV사업을 벌이며, 초국가적인 음반자본들은 전세계에 지사를 설립하여 대중음악을 판매하게 된 것이다. 거기에 더해 1980년대부터 급속도로 발전한 정보통신기술은 국제적인 문화 전파와 교류를 더욱 가속화시켰고, 특히 인터넷의 발달은 국가간 문화 교류의 장벽을 결정적으로 사라지게 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이와 같은 변화의 흐름을 피해갈 수 없었다. 1980년대 중후반부터 시작된 문화시장 개방의 추세는 확대되었고, 디지털 기술의 발전과 함께 정보화가 촉진되면서 세계적인 네트워크에 편입되게 된다. 이른바 ‘세계화’의 담론은 그와 같은 추세에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세계화의 상황에서 과거와 같은 문화 제국주의론과 민족문화론은 더 이상 현실적인 대응 능력을 가지기 어렵게 되었다. 과거와 같이 ‘우리 것’과 ‘남의 것’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그리 명료하지 않을뿐더러 우리 문화의 정체성 자체도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규정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말이 문화 제국주의적 상황 자체를 부정하거나 민족문화의 의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제 적어도 민족문화를 생각하는 우리의 사고 방식에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의미이다.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진행된 전세계 자본주의의 발전과정과 기술적 발전, 그리고 국제 관계에서 파생되는 지구화, 국제화, 세계화의 추세를 거부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또 하나 중요한 주제는 한국 사회가 이미 오래전부터 빠르게 다문화사회가 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은 2007년 8월에 단기 체류 외국인과 장기 체류 등록 외국인을 합쳐 100만 명을 돌파했고, 그 수는 점차 더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국제 결혼의 사례를 찾을 수 있고, 이주노동자 수도 지속적으로 늘고 있다. 오래된 다인종, 다민족 국가에 비하면 그 비율이 결코 높지 않다고 해야겠지만, 단일 민족, 단일 언어, 단일 국가의 신화 속에서 살아온 입장에서 보면 이런 변화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다문화사회라는 용어가 최근 중요한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거와 같은 좁은 의미의 민족문화 개념을 고수하는 것은 비현실적일 수 밖에 없다. 우리 시대의 대중은 더 이상 단일 민족, 단일 언어라는 울타리 속에 살고 있지 않다.
이러한 상황은 이제 과거와 다른 민족문화의 개념을 요구하고 있다. 이른바 다매체 다채널의 시대, 선진국 문화산업 자본의 거리낌 없는 유입과 다국적 문화상품의 범람, 다문화사회로의 진입이라는 현실 앞에서 고유의 전통문화만을 민족적인 문화로 간주하는 소박한 민족주의적 시각은 이제 더 이상 현실적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