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 ()

근대사
사건
1884년(고종 21) 급진개화파가 청나라로부터의 독립과 조선의 개화를 목표로 일으킨 정변.
사건/사회운동
발생 시기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종결 시기
1884년 12월 6일(음력 10월 19일)
관련 국가
조선|청나라
관련 단체
개화당
관련 인물
고종|김옥균|박영효|서재필|홍영식|서광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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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갑신정변(甲申政變)은 1884년(고종 21) 급진개화파가 청나라의 내정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운 정치외교권 확보와 조선의 개화를 목표로 일으킨 정변이다. 1884년 12월 4일(양력)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 등 급진개화파가 청나라로부터의 독립과 조선의 개화를 목표로 일으킨 정변이었으나, 청나라의 군사 개입과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함으로써 3일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정의
1884년(고종 21) 급진개화파가 청나라로부터의 독립과 조선의 개화를 목표로 일으킨 정변.
발단

1876년 개항 후 위정척사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개화사상은 확산되었다. 갑신정변 주도 세력은 임오군란 후 개화 정책 추진과 반청 외교의 전개 과정에서 성장, 결집되었다. 임오군란 후 청국은 흥선대원군을 납치하였고 조선에 3천여 명의 군대를 주둔시켰으며, 군제 개편 등 조선의 내정에 깊숙히 관여하였다.

청국 장수 오장경(吳長慶)과 위안스카이〔袁世凱〕는 병권을 장악하고, 재정 고문으로 파견된 진수당(陳樹棠)은 재정권을 장악했으며, 이홍장이 파견한 묄렌도르프(Mӧllendorff, P.G.)는 해관을 장악하였을 뿐 아니라 외교권까지 장악하려 하였다. 또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체결 후로는 특권을 앞세워 경제적 침탈을 자행하였다.

당시 개화 정책은 민씨 척족과 그 일파가 장악한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을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이들은 임오군란 후 흐트러진 군제(軍制) 개편에 주력하였고, 개화 자강 기구의 신설을 주도하며 청나라식 개화 정책을 주관하였다.

반면 개화당(開化黨)박영효(朴泳孝), 윤웅렬(尹雄烈)은 각각 광주‧북청에서 신식 군대를 양성하였고, 『 한성순보(漢城旬報)』 발간과 치도 사업 등을 적극 추진하였다.

고종의 지지를 등에 업은 개화 사업들은 민씨 척족의 반발로 중단되었지만, 개화당 세력은 여전히 고종의 신임을 받는 가운데 외교, 정치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며 성장해 나가면서 민씨 척족 일파와 대립하였다.

개화당은 청나라의 내정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운 정치외교권 확보를 주요 목표로 설정하였고, 완전한 자주국(自主國)을 이룩하고자 하였다. 이들의 반청 외교 노선은 자주 국체를 유지하려는 고종의 의도와 부합하였다.

경과 및 결과

1884년 4월 청이 프랑스와의 전쟁에 직면하면서 3,000명 규모였던 조선 주둔군이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청불전쟁의 소식은 개화당에게 독립을 달성할 절호의 기회로 여겨졌다. 개화당은 1884년 6월 쿠데타를 통한 정변을 결정하고 준비에 착수하였다. 이들은 정변 발생 시 청나라군의 무력 개입을 막고자 미국 공사와 영국 영사의 정변에 대한 적극적 지지 표명과 지원을 기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주한미국공사 푸트(Lucius H. Foote)와 김옥균(金玉均)으로부터 정변 실패를 예견하며 신중을 기하라고 제지를 당하였다. 당시 영국은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외교적으로 뒷받침하던 형편이었고 영국 영사 애스턴(William G. Aston)은 정변을 만류하였다.

1884년 청불전쟁이 본격화되자 일본 정부는 기존의 소극적인 대한 정책을 변경하였다. 1884년 9월 서울로 돌아온 주한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郎〕는 김옥균을 만나 일본의 대한 정책 전환을 알렸다. 정변 발생 열흘 전 10월 8일 김옥균은 다케조에와 거사의 세부 계획을 최종 협의, 확정하였다.

김옥균은 거사 후 개혁에 필요한 자금을 차관 형태로 빌리고자 하였고, 다케조에는 삼백만 원 규모의 차관을 마련할 수 있다고 약조하였다. 10월 13일에 정변 일자는 10월 17일로 결정한 후, 정변 주도 세력은 박영효 집에 모여 행동대원들에게 우정국 옆 별궁 방화, 우정국 개청 축하 연회 때 거사, 4영사 제거 등 구체적 행동 지침을 전달하였다.

정변 주도 세력은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정변 수행에 필요한 정보 제공원을 포섭하였다. 권력의 핵인 국왕의 동태를 파악할 수 있는 환관, 무력을 동원할 수 있거나 무력으로 이용될 수 있는 사관생도와 친군 전영 소속 군인, 장사 등이 그 대상이었다.

‘위국(爲國), ’위국(衛國)‘ 등 국가에 대한 애국의 관점을 명분으로 제시하고 개화와 독립이라는 이슈를 내세웠다. 관직이라는 보상책을 제시하거나, 충의계 등 기존 조직과 개인 관계를 이용하여 포섭에 활용하였다.

정변 과정에서 동원된 무력으로, 정권 장악 이전 개화당 자력으로 확보한 무력은 사관생도, 친군전영, 장사, 부상 등 200여 명 정도였고, 여기에 일본군이 가세해 총 3~4백 명 정도였다. 정권 장악 후 박영효와 서광범이 각각 전후영사(前後營使), 좌우영사(左右營使)를 맡아 곧바로 4영 군사 2천여 명을 동원해 궁궐 숙위(宿衛)를 담당케 하여 청나라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평소 청나라식 훈련을 받았고 전후영군과 대립 관계에 있던 좌우영군의 포섭과 장악을 소홀히 한 결과 이들은 이반하여 청나라군에 협조하였다. 아울러 총, 칼 등 무기를 제대로 정비하지 못한 것과 일본군에 지나치게 의존한 것도 정변 실패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갑신정변은 1884년 10월 17일(음력) 오후 9시경 별궁 방화를 시작으로 개시되어 10월 19일(음력) 오후 7시경 막을 내렸다. 이 단시간에 개화당은 급속도로 권력을 장악하고 인사를 단행하였고 정령을 반포하였다. 일본군 철수와 청국군 개입에 대비해 군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였다.

10월 17일 당초 계획과 달리 별궁 방화와 우정국에서 4영사 처단에 실패하자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은 고종 침실로 들어가 우정국 변란을 알리고 경우궁(景祐宮)으로 이어를 요청하였다. 또한 고종의 친필 칙서를 받아 일본병을 요청하여 호위하게 하였다.

자정을 넘겨 10월 18일, 행동대원들은 경우궁을 찾아온 이조연(李祖淵), 한규직(韓圭稷), 윤태준(尹泰駿), 민영목(閔泳穆), 조영하(趙寧夏), 민태호(閔台鎬)를 차례로 살해하여 민씨 척족의 거물과 군권을 가진 3영사를 제거하였다.

개화당은 고종의 종형 이재원(李載元)을 불러 정변의 의도를 설명하고 협조를 구하였다. 또한 개화당의 일원이었다가 돌아선 환관 유재현(柳在賢)도 처단하였다.

이어서 개혁을 추진하기 위한 인사를 단행하였다. 이때 단행된 인사를 통해 정변 주도 세력은 의정권(議政權), 군사 · 치안권, 재정권을 장악하고자 하였다. 좌우영사에 홍영식(洪英植), 전후영사에 박영효, 좌포도대장에 박영효, 우포도대장에 서광범을 임명하는 등, 개화당은 군권과 치안권 확보를 위해 4영과 포도청에 집중 포진하였다. 또한 재정을 관장하는 호조참판에 김옥균을 임명해 재정을 장악하려 하였다.

아울러 이재면, 이준용 등 대원군 계열의 종친과 조경하, 조동면, 김문현, 홍순형 등 왕실 외척과도 연대를 도모해 정변이 가진 역모의 이미지를 희석시키려 하였고, 김윤식, 김홍집, 신기선동도서기론 계열의 개화세력도 끌어들여 민씨 척족 중심의 권력구조에서 소외된 자들을 규합하였다.

왕후는 경우궁이 비좁다는 이유로 창덕궁 환궁을 끈질기게 요구하였고, 개화당은 임시방편으로 고종과 왕후를 이재원의 집인 계동궁(桂洞宮)으로 옮기게 하였다. 김옥균은 방어에 불리하다는 이유로 요구를 묵살하였으나, 김옥균이 나간 사이 일본공사는 고종의 환궁 요구를 수락하였다.

개화당은 어쩔 수 없이 고종과 왕후의 거처를 창덕궁 관물헌(觀物軒)으로 옮겼다. 청측에서 궁궐 문을 잠그지 말라고 요청하여 정변 개입 의도를 표출하자, 개화당은 청군에 대한 경계 태세를 높이고 구체적 개혁 구상을 담은 정령(政令)을 작성하기 시작하였다.

10월 19일, 오전 10시경 정령을 반포하였다. 공포된 정령은 80여 개 조항에 이르렀다고 하나 현재 14개 조항만이 『 갑신일록(甲申日錄)』에 전한다. 한편 정변 주도 세력은 무력 정비를 위해 각 영이 보유한 총과 칼을 정비하도록 했는데, 총이 모두 녹슬어 총을 모두 분해해 소제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때 남양 지방 청군 200명의 입경 소식을 접한 일본공사가 청일 양국의 충돌을 우려하여 군대 철수 의사를 밝히자 김옥균은 기다려 달라고 만류하였다.

오후 2시 30분에서 3시 경 청국 진영에서 일본공사에게 보낸 서한을 뜯기도 전에, 청나라군이 동 · 남문으로 협공해 들어왔다. 청나라군과 일본군의 교전이 시작되자 왕후와 세자 · 세자빈은 궁문을 나갔고, 고종은 뒷산 기슭으로 올라갔다. 고종을 연경당으로 모셔온 김옥균은 다케조에에게 고종을 모시고 인천으로 가려 했으나, 고종은 인천으로 가지 않겠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청군의 공격을 받으면서 패퇴하던 개화당과 일본군은 결국 철수하기로 하였다.

개화당 중 홍영식과 박영교는 사관생도들과 함께 고종을 호위해 북묘로 향하였다가 청군과 조선 군인에게 살해되었다. 김옥균 등은 다케조에를 따라 일본공사관로 후퇴하였다. 고종은 청군 진영으로 옮겼다가 10월 23일 창덕궁으로 환궁하였다. 왕후 일행은 심상훈(沈相薰)의 호위를 받으며 이경하의 교외별장이 있던 각심사에 피신했다가 10월 24일 창덕궁으로 환궁하였다.

10월 20일 민중은 일본공사관을 향해 돌을 던지고 방화하였다. 공격이 계속되자 일본공사와 김옥균 등은 일본군 호위하에 인천으로 향하였다. 10월 23일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유혁로, 변수, 이규완, 정난교, 신응희 등 9명은 인천에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로써 갑신정변은 실패로 끝났다.

한편 대부분 민중 계급에 속했던 갑신정변 참여층은 개화사상의 보급이나 유학을 통한 외국 문물 접촉을 통해 개화사상을 수용하였다. 이들은 정변 주도 세력과 마찬가지로 청나라로부터 독립과 개화를 국가적 과제로 이해하였다. 참여층은 정변 실패시 자신은 물론 가족까지도 처형될 것을 알면서도 자원하여 정변에 동참하였다.

참여층의 신분은 양반 13%, 중인 6%, 상놈(常漢) 51%로 나타나는데, 이 가운데 상한의 실제 비중은 60~70%가 될 것으로 짐작된다. 참여층의 직업은 하급관료, 군인, 하인, 환관, 상인 등으로 봉건 정부 조직과 직 · 간접적인 연관성을 가졌고, 대부분 농민이었던 전국적 직업 구조와는 완전히 달랐다. 군제 개혁, 인재 등용, 혜상공국 혁파, 내시부 혁파와 재능 있는 자의 등용 등 이들의 직업인으로서의 요구는 정령에도 부분적으로 반영되었다.

그러나 정변에 참여하지 않았던 일반 민중은 군사 근대화 정책으로 인한 실직과 차별 대우,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체결 후 심화된 외국 상품의 침투, 당오전의 발행과 유통으로 인한 물가 상승, 도로정비로 인한 가옥의 철거 등에 불만을 가졌고, 일부 개화 정책 추진 과정에 일본인이 들어가자 개화 정책을 일본의 침략을 연계하여 이해하면서 개화에 대한 부정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일반 민중은 개항 이래 일본을 침략자로 여겼고, 갑신정변에 대해서도 난당과 일본인이 일으킨 사건으로 인식하였다. 특히 정변 마지막 날 고종이 폐립되었다는 유언비어가 확산되면서 민중의 분노가 폭발하였다. 이는 일본인을 만나기만 하면 살해하고 개화당의 집을 파괴하는 행위로 이어졌다.

갑신정변은 ① 일본군을 끌어들여 민심의 저항을 초래한 점, ② 고종의 이반과 권력 기반의 조성에 실패한 점, ③ 좌우영군의 장악을 소홀히 하여 이탈을 방조하고 무기를 정비하지 않은 점, ④ 독립과 개화라는 정변의 목표와 지향이 당대의 사회적 요구나 정서와 거리가 있었던 점, ⑤ 일본과 청이라는 외세의 본질적 속성에 대한 파악의 미흡 등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실패하였다.

정변 실패 결과 참여자들에게는 적몰가산(籍沒家産), 파가저택(破家瀦澤)의 형이 집행되었고 부모, 형제, 처자에게도 연좌법이 적용되었다. 갑신정변 주도자 혹은 참여자 중 사망자 44명, 일본 망명자 9명, 유배자가 1명으로 확인된다. 이외에도 김옥균과 내통 혐의를 받은 자들은 숙청되었다.

갑신정변은 나라를 팔고 겨레를 배반한 사건으로 이해되었고, 그 결과 개화 정책 전반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개화에 대한 인식 악화는 개화 정책의 중단, 개화세력의 위축, 여론을 등에 업은 수구세력의 반동으로 이어졌다. 고종은 김옥균 등을 난적으로 규정하고 변란으로 규정하며 처벌 의지를 내비쳤다. 이어서 개화 정책 관련 기구를 폐지했고, 위정척사 계열 인물들을 대거 석방하였다.

정변 이후 청의 조선 내정에 대한 영향력은 더욱 강화되었고, 친청파들이 정국을 좌우하였다. 하지만 고종은 왕권 회복을 위한 물밑 작업을 진행하여 러시아에 군사적 보호를 요청하는 조러밀약을 추진하는 한편, 1885년에는 개화 자강 업무를 추진할 내무부를 설립하여, 정부 정책면에서 정변의 반동과 역효과는 오래 가지 않았다.

일본측은 정변으로 소실된 공사관 건물에 대한 배상과 조선 정부측 사죄를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1885년 1월 9일(음력 1884년 11월 24일) 「 한성조약」이 체결되었다. 한편 정변 후 청일 양국군이 주둔하던 상황에서 양국 간 개전 가능성에 대한 불안감이 고조되던 가운데, 주중영국공사 파크스(Sir Harry S. Parkes)의 중개를 통해 청일 양국군의 철수를 규정한 「텐진조약」이 1885년 4월 18일 체결되었다.

특히 이 조약에서 장래 조선에 변란이 발생할 경우 청일 양국이나 한 나라가 파병할 경우 상대방에 알린다는 내용은 이후 1894년 동학농민전쟁 당시 일본이 파병할 수 있는 근거로 작용하였다.

의의 및 평가

갑신정변은 집권층 내에서 일어난 위로부터의 변혁을 시도한 사건이었다. 갑신정변 주도 세력은 조선의 완고한 풍속을 교도하여 변화시켜야 할 것으로 간주하였다. 정부 조직에 대해서도 무조건 타파하기보다는 운영 모순을 바로잡으려 하였다. 이들은 조선의 전통적 가치를 바탕으로 개혁을 추진하고 서구화, 문명화의 논리를 수용하려 하였다.

당시 조선의 주권을 위협하였던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달성하려 하였고, 근대적 독립국가를 지향하였다는 점에서 근대 민족주의 운동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본과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적 성격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던 한계를 지닌다.

귀족 계급인 양반이 정변을 주도하였다는 점에서 부르주아 정변이라 보기는 어려우나, 개혁 구상에 서구 부르주아 계급이 실현하려 한 내용이 내포된 점, 사회 경제적으로 근대적 가치를 추구하고 자본주의를 지향하였다는 점에서 부르주아적 개혁운동이라 할 수 있다.

갑신정변 실패로 인한 반동과 역효과는 컸다. 단기적으로는 수구 세력의 반동을 불러와 개화 정책 추진의 지연을 초래하였고, 개화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심화시켰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정변의 지향, 목적, 민주제도와 인민 평등의 가치가 일반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고, 재능에 의한 출세와 사회적 지위 획득이 가능한 근대적 가치를 전파하였다.

갑신정변이 추구하였던 개혁의 내용과 지향성은 이후 갑오개혁 등 각종 개혁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한 점에서 우리나라 근대 변혁 운동의 초석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원전

『갑신일록(甲申日錄)』

단행본

김종학, 『개화당의 기원과 비밀외교』(일조각, 2017)
최덕수 외, 『조약으로 본 한국 근대사』(열린책들, 2010)
한국사연구회 편, 『새로운 한국사 길잡이 하』(지식산업사, 2008)
박은숙, 『갑신정변 연구』(역사비평사, 2005)
김용구,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사대질서의 변형과 한국 외교사』(원, 2004)
『갑신정변연구』(한국정치외교사학회, 1986)
이광린, 『개화당연구』(일조각, 1973)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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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일, 「갑신정변의 막후지도자 유대치」(『동북아』 4,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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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규, 「개화파와 토막파의 사회경제적 배경과 근대지향성에 관한 비교연구」(『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42, 1994)
최덕수, 「갑신정변과 갑오개혁」(『한국사』 11, 한길사, 1994)
신용하, 「김옥균의 개화사상」(『동방학지』 46·47·48합집, 1985)
관련 미디어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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