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경집(景集), 호는 완서(翫西). 이용규(李用奎)의 아들이다.
1880년(고종 17) 사헌부감찰로서 개항 후 처음으로 파견되는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다녀왔고, 이듬해 다시 수신사 조병호(趙秉鎬)의 종사관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1882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이해 고선관(考選官)으로 청나라에 가서 영선사 김윤식(金允植)을 따라 톈진[天津]에 간 유학생·공장(工匠)들의 실정을 조사하였다.
이어 흥선대원군이 임오군란 때에 조선에 진입한 청국군에 의하여 청나라에 끌려간 뒤 통리기무아문주사(統理機務衙門主事)로 사은 겸 진주사(謝恩兼陳奏使) 조영하(趙寧夏)의 종사관이 되어 청나라에 가서 흥선대원군 수금(囚禁)에 대한 감사를 표하고 귀국하였다.
이해에 청나라의 제도를 본떠 군제개혁이 단행되자 친군영좌감독(親軍營左監督: 뒤의 左營使)이 되고, 이어 참의교섭통상사무(參議交涉通商事務)·기계국총판(機械局總辦)·혜상공국총판(惠商公局總辦)·이조참의·함경북도병마절도사 등을 지냈으며, 1884년에는 협판군국사무(協辦軍國事務) 겸 기계국총판을 지냈다.
친청정치행적으로 개화당으로부터 사대당이라고 지목을 받아오던 중 1884년 갑신정변 때 우정국사건이 벌어지자, 이에 참석하였던 이조연이 국가대사가 벌어짐을 눈치채고 궐내로 들어가려던 중 전영사(前營使) 한규직(韓圭稷), 후영사(後營使) 윤태준(尹泰駿) 등과 같이 개화당 행동대에 의하여 피살되었다. 뒤에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貞)이다.